[해양소설 ‘갤리온 무역’19] 애드문의 출생과 성장의 비밀
<3부> 리카르도와 애드문 9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애드문은 절대왕조를 신봉하거나 자유(종교와 무역을 가릴 것 없이)를 억압하는 기득권층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에게 배분된 노획물들은 극히 일부만 가족들에게 익명으로 보냈고 (애드문은 가족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머지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공화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애드문은 1562년 네덜란드 북부지역인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은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중세 이후 공업과 무역이 번창하여 도시들은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지고 자유의 바람이 넘쳐 있었다.
애드문이 태어나기 50여년 전 발생한 종교개혁 이후부터 이 지역에 신교도가 크게 증가했다. 1556년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가 신교파를 탄압하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을 뿐 아니라 상업을 제한하며 자치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네덜란드의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시민계급까지 참여한 항거운동이 1566년부터 전개되었다. 이때의 지도자급은 봉건적 대귀족 출신인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 등이었고, 애드문의 아버지는 에그몬트 백작의 시종이었다.
항쟁의 기운이 움틀 즈음인 1567년, 펠리페 2세의 위임을 받은 네덜란드 총독이 에그몬트와 호른, 애드문의 부친 등을 비롯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으로 사형시켰다.
그 때 애드문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는데 천만다행으로 당시 그의 모친은 애드문을 데리고 리스본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 중이어서 화를 면했다. 훗날 베토벤과 괴테는 이 시대영웅의 일대기를 작품에 실어 서곡 <에그몬트>라는 명작을 만들어냈다.
펠리페 2세의 공포정치 하에서도 네덜란드 상인들과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하던 중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격파되어 국제적 지위가 하락되고 재정적으로 궁핍하게 되자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점차 유리하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과 영국이 해전을 벌이고 있을 때 애드문은 엔리케 항해학교를 졸업한 후 지중해의 상선에서 항해사로서의 경험을 쌓고 있었다.
1598년, 애드문은 그동안 모은 재산으로 갤리온 선을 구입하여 선장 겸 선주로서 본격적으로 무역에 참여했다. 그러는 한편 적극적으로 해적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역을 통한 이익금과 해적선에서의 노획물의 일부를 네덜란드의 독립운동가들과 영국의 의회파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가 영국인들과 접촉할 때에는 항상 리처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마침 그 해(1598년)에 독재자 펠리페 2세가 사망하기도 하여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609년 펠리페 3세의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12년간의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그해부터 애드문은 그의 상선을 마닐라와 멕시코 항로에 투입하여 갤리온 무역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1603년 즉위한 제임스 1세가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이 있고 신하에게는 책임지지 않으며,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국왕은 곧 법이다”라고 주장하며 절대권력을 옹호했다. 이에 대항하는 의회파들을 은밀하게 지원하던 애드문의 노력은 훗날 (1628년) 차기 왕이었던 찰스 1세로 하여금 권리청원에 서명하도록 함으로써 쾌거를 이뤘다. 권리청원에는 그가 의회파들을 지원하며 염원했던 두 가지 핵심사항이 들어 있었다.
첫째,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
둘째, 합법적인 판결을 거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체포, 구금, 재산권 박탈 및 기타 손해를 입을 수 없다.
한편, 정치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애드문과 선원들은 펠리페 3세의 호의와 약속을 받은 후에도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평생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한 채, 은밀히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그래서 그들의 가족은 가장이 실종되어 재산을 이미 상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해마다 몇 차례씩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어떤 독지가로부터 거액의 돈을 기부받곤 했다. (3부 끝, 4부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요새’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