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소설 ‘갤리온 무역’⑦] 드레이크 선장 엘리자베스여왕 후원 아래 해적질 ‘만끽’
제2부 유다양 5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그 후 얼마동안 유다양은 해적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생애 처음으로 즐거운 생활을 만끽했다. 라틴어와 수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있음을 알아챈 프랑스 해적선장은 유다양을 수습 항해사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해적들에게 납치된 여자들은 수에그라호 안에서 모든 해적들의 성적 노리개였다. 유다양에게는 그들에 대한 동정심은 하나도 일지 않았고, 오히려 해적들보다 더 잔혹하게 그녀들의 육체와 성기를 학대했다. 먼동이 틀 무렵의 새벽이면 갑판 위에 서서 큰 소리로 롱사르(1524-1585)의 시를 노래하며 우쭐해했다.
어젯밤 잠잘 땐 오늘 아침에,
나보다 먼저 깬다고 맹세했었지.
허나 예쁜 소녀에겐 곤한 새벽잠
거슴츠레한 눈엔 아직도 단잠.
자아, 자! 네가 어서 일어나도록
눈이랑 젖꼭지에 뽀뽀해 주마.
그의 노랫소리에 해적들은 낄낄 거리면서 눈을 떴고 여자들은 고통과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유다양에게는 그러한 것이 한낱 장난에 불과했다. 재미있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해적들의 눈에 훌륭하게 보이고 싶기도 했다. 해적들이 그들 패거리들의 문양이 새겨진 두건(頭巾)을 주자, 그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던 유다양은 빨리 전투에 투입되어 약탈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쳐 올랐다.
그 무렵 대서양에서는 영국해적 드레이크 선장(1540-1596)이 영국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큰 활약(해적질)을 벌이고 있었다. 유다양은 드레이크 선장을 흠모하며 그와 같은 전설적인 해적 왕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꿈은 너무나도 쉽사리 이루어지는 듯 했다. 얼마 후에 드레이크 선장과 만나게 되었으니까.
유다양보다는 31살이 더 많은 드레이크는 일찍이 거친 파도로 유명한 북해 연안을 항해하면서 항해지식을 터득했고, 남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인도양을 처음으로 항해한 영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스페인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영국의 사략해적(私掠海賊: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은 해적)으로 더욱 유명했다.
1573년 드레이크는 여왕의 지시를 받아 스페인 소유인 파나마의 귀금속 저장소를 습격하였고, 약탈한 보물들을 가지고 플리머스로 귀환하자 국민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1577년 드레이크는 생애 처음으로 대면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스페인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손해를 입히는 것뿐만 아니라, 여왕의 이권과 함께 드레이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도 좋다는 공식 허가를 얻은 후, 그해 12월 5척의 소형 선박에 200명 남짓 되는 사람을 이끌고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했다.
원정함대의 기함旗艦은 약 100톤 짜리 크기인 ‘더골든하인드호’ 였다. 드레이크는 처음 출발할 때 승선했던 100명의 선원들 중에서 56명만이 끝까지 살아남은 가운데 2년 만에 세계를 일주하여 1580년 9월 26일 플리머스항에 돌아왔다. 이 배에는 보물과 향료가 가득 실려 있었으며 (물론 그가 세계일주하는 동안 강도짓을 하여 모은 것들이었다.) 드레이크의 몫은 평생을 써도 좋을 만큼의 재산이었다.
그는 자신의 배로 세계일주를 한 최초의 선장이었으며(포르투갈의 마젤란은 세계일주 항해를 끝마치기 전에 죽었음) 태평양과 인도양, 남대서양을 항해한 최초의 영국인이 되었다.
스페인측은 드레이크가 스페인제국 해역에서 해적질을 했다고 비난했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히려 템스강 어귀에 정박한 ‘더골든하인드호’에 몸소 올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림으로써 스페인 황제를 조롱했다.
1581년 드레이크는 플리머스 시장이 되어 해적에서 정치가로 활동하였으나 그로부터 4년 뒤에 여왕의 요청에 따라 해적질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유다양은 우연히 해적이 된 것이다.
유다양을 받아들인 해적선 수에그라호는 지중해와 대서양연안, 그리고 멀리 캐리비언 연안까지도 약탈하고 다녔던 프랑스 해적이다. 그들은 제법 규모가 큰 갤리온 선에 100명 이상의 해적들이 타고 다녔다.
유다양이 합류한 후 수에그라호의 해적들은 스페인의 식민지인 콜롬비아 해안 도시들을 약탈하기로 결정하고 카리비안해로 향했다. 유다양으로서는 해적으로서 그리고 수습 항해사로서의 첫 항해였다.
그런데 목적지인 카르타헤나항에 접근하자마자 그 항을 약탈하기 위해 미리 와서 전열을 짜고 있던 드레이크 선장의 선단에 발각되어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나포되어 버렸다. 25척으로 구성된 드레이크 선장의 해적선단에 단기單期인 수에그라호는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은 거였다.
드레이크 선장 앞에 포박된 채로 끌려간 수에그라호의 해적들과 유다양은 적도의 따가운 태양이 멀리 서쪽 해안의 산봉우리에서 힐끔거리며 내려다보는 동안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 해역에서 노략질을 일삼고 있느냐? 소속이 어디냐?”
수에그라호의 선장이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존경하옵는 드레이크 선장님! 저희는 누구의 지시를 받거나 그 어떤 왕에게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선장님 휘하에 들어가고 싶은데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목숨 걸고 최전방에서 싸울 것이며 전리품은 나눠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프랑스 해적 선장의 읍소에 그의 곁에서 묶인 채로 무릎을 꿇고 있던 휘하 해적들이 일제히 드레이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유다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드레이크 선장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더니 해적들의 뒤 쪽에 끌려나온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심하게 학대를 당했는지 그 몰골들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드레이크 선장은 비록 해적질을 하고 다녔지만 여자들에 대한 배려심와 동정심은 육지 사람들보다 더 강한 영국신사라고 자부하던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