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소설 ‘갤리온 무역’⑥] 유다양, 노예선 선장 단숨에 베고 선박 안 10~20대 예쁜 여인들에 눈길
제2부 유다양 4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바로알기> 저자] 유다양만이 세바스찬 호에 홀로 남아 배를 지키고 있었다. 그믐이었는지 달도 뜨지 않았고, 자욱한 겨울 안개에 묻히어 열 발자국 이상 떨어진 물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소년 유다양은 한 달 동안 거의 잠도 못 잔 채 고된 노동을 하였기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선장과 갑판장이 무섭기도 하여 벌벌 떨며 새우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영하의 날씨와 더러운 담요에 득실거리는 벼룩이 온 몸을 물어뜯어 도저히 편한 잠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 새벽 두시쯤 되었을 무렵, 어디선가 생소한 언어와 거친 억양으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노들의 바닷물 치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선잠이 깬 유다양은 긴장하여 귀를 바짝 세웠다. 잠시 후, 무언가 묵직한 물체가 부두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갑자기 우르르 부두로 뛰어 내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더니 사람들의 함성과 총소리, 칼 부딪치는 소리, 비명소리들이 산세바스찬 항의 밤공기를 가득 메웠다. 해적들의 습격이었다. 유다양은 멀리서 바람에 실려 날아온 화약 냄새와 매케한 연기냄새를 맡았지만 겁에 질려 담요 밖으로 얼굴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략 세 시간이 흐른 후 소란과 혼란이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소년 유다양은 세바스찬 호의 선실 안에서 담요 속에 숨어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담요를 홱 걷어치우며 소리를 캑 질렀다.
“빨리 일어나 닻을 올려!”
선장이었다. 술에 얼마나 절어 있었는지 온 몸에서 고약한 술 냄새가 진동했고, 그가 말을 뱉을 때마다 술이 묻은 침이 온 사방에 튀겼다. 몸마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렸다.
갑판으로 나와 보니 어느 덧 안개가 걷히었고 산세바스찬 항구 마을의 이곳저곳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황급히 뛰어 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세바스찬 호의 어부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갑판장도 없었다.
유다양이 돛폭이 내려져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선장은 배와 부두를 연결해 놓은 줄을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에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해 줄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해적으로 보이는 사내 네 사람이 저마다 칼을 들고 세바스찬 호에 올라왔다.
“저 녀석 잡아라!”
선장이 갑판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이쿠, 나리님들! 제발 목숨만 살려줍쇼.”
“네가 이 어선의 선장인 듯한데, 고기 판돈은 어디 있나?”
선장이 얼른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끄집어내었다.
“네, 네, 여기 있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해적들 중에 한 명이 유다양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이리와!”
유다양은 벌벌 떨고 있었고 다리마저 풀렸는지라 한마디도 대꾸를 못하고 선장 곁까지 기어서 갔다.
“너는 이 녀석과 어떤 관계냐? 아들이냐?”
유다양은 감히 눈을 들어 그들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그럼 노예냐?”
유다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꼬마! 너에게 이 녀석과 이 배를 맡기마! 네가 어떻게 처분하느냐에 따라 네 목숨을 살려줄지 결정하겠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동료해적들이 껄껄껄 웃으며 그 말에 동의했다. 순간 유다양에게는 해적들이 그토록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해적들을 따라가고 싶다는 욕구도 퍼뜩 들었다. 게다가 지난 한달 동안 자신을 학대했던 선장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도 끓어올랐다.
유다양은 갑자기 치솟는 힘과 용기로 발딱 일어나 갑판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던 쇠갈고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갑판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어리둥절해 있는 선장의 어깨를 향해 힘껏 내리 찍었다.
“헉!”
선장이 비명을 지르며 갑판 위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부들거렸다. 유다양은 미처 갈고리를 그의 어깨에서 빼지 못하고 손잡이를 놓쳐버렸다. 그렇지만 갈고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어깨 죽지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선장의 양손을 뒤로하여 닻줄로 칭칭 동여맸다. 그러고 나서 해적들이 돛대에 걸쳐놓은 횃불을 가져다 돛폭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삽시간에 돛과 돛대 그리고 갑판에 옮아 붙었고, 갑판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던 선장의 옷과 몸을 덮쳤다.
해적들도 방금 눈앞에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입가에는 만족하다는 듯한 잔인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해적들은 소년 유다양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들이 몰고 왔던 해적선 수에그라 호로 옮겨 탔다.
새벽녘이 다가와 먼동이 트려고 하고 있었고, 수에그라 호에는 이미 산세바스찬 항에서 약탈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온갖 조각품들과 장식품들, 은제 촛대와 은제 접시 등이 많이 눈에 띄었다. 돈을 주어 담았음직한 자루들도 여럿 있었다. 놀라운 것은 10대와 20대로 보이는 어여쁜 여자들도 다섯 명이나 납치해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