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소설 ‘갤리온 무역’⑤] 열네살 유다양, 청어배 노예로 뼈 부스러지는 고통의 나날

제2부 유다양 3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바로알기> 저자] 그럭저럭 3년의 세월이 지났다. 겨울철에 접어들어 대서양의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부들의 바다사냥도 점차 활기를 잃고 집에서 소일하는 날이 많아지곤 했다.

1585년 1월 어느 날, 이제 열네 살이 된 유다양은 산티아고의 손에 이끌려 선창에 정박 중인 제법 큰,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어선보다 세배는 커 보이는 ‘세바스찬’이라는 이름이 선수 양쪽에 새겨진 어선으로 갔다. 산티아고의 지시에 따라 유다양은 집을 나설 때 옷가지들을 쑤셔 넣은 자기 몸 크기만큼 큼직한 가방을 가지고 나왔었다.

산티아고는 세바스찬 호의 선장인 듯한 험상궂게 생긴 뱃사람과 몇 마디를 나누고 나서 돈을 받았고, 이내 유다양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배를 떠났다. 유다양은 세바스찬 호에 남겨졌다. 유다양은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어선에 팔린 것이다. 세바스찬 호는 포르투항을 떠나 사나흘을 항해한 후 청어 잡이를 시작했다.

차가운 바다에서 사는 청어는 여름철에는 발트 해 인근까지 북상하고 겨울철에는 영국과 프랑스인근 해역까지 남하하기도 했다. 몸길이가 35cm 정도로 정어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북대서양 바다 속에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어서 유럽인들의 주된 식량원이었다. 맛이 고소했고, 특히 내장을 제거한 후 소금에 절이면 오랫동안 보관하여 먹을 수 있다는 방법이 알려진 이후 유럽인, 특히 영국인과 장기간 항해를 해야 하는 선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다양은 어부들이 잡아 올린 청어를 갑판 위에서 손질해야 했다. 주머니칼로 청어의 내장을 끄집어내고 그 속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벌벌 떨면서 일했지만 선원들 중 그 누구도 소년 유다양을 동정하거나 배려해 주지 않았다.

어선들은 최대한 많은 청어를 잡아 어창에 싣고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어부들이 먹고 마실 식량과 물은 최소한으로 싣고 다녔다. 출어出魚한지 한 달 이내에 어창을 가득 채워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청어가 떼 지어 몰려 있는 바다까지 항해하는 며칠과 청어 잡이가 끝나고 항구로 돌아오는 며칠을 제외하고 조업을 해야 하는 보름여 동안에는 어부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양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선장과 갑판장은 수시로 갑판 위를 돌며 어부들을 독려했고, 누구라도 한가하게 쉬고 있는 어부들이 눈에 띄면 들고 있던 쇠갈고리로 사정없이 그들의 어깨를 내리 찍었다. 그럴 때마다 어부들은 비명을 질러댔고 갈고리에 찍힌 어깨에서는 피가 선연하게 흘렀지만 선원들은 선장과 갑판장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 정도로 당시의 어선 선장들과 갑판장들은 난폭했고 무자비했다. 나이가 어리다하여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다양은 돈을 주고 산 노예이지 않던가!

유다양이 승선한 후 첫 조업을 마친 세바스찬 호가 스페인 북쪽의 산세바스찬 항에 입항할 때까지 다른 선원들은 휴식을 취했지만 유다양에게는 쉬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갑판을 청소하고 선장과 갑판장의 옷가지와 침구를 빨거나 햇볕에 말려야 했다.

산세바스찬 항에 도착하자마자 선장은 청어를 부두에 모여든 상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기 위해 협상하느라 분주했고, 어부들과 유다양도 청어를 부두로 하역하느라 또 다시 뼈가 빠지게 일을 했다. 그날 밤, 세바스찬 호의 선장은 청어를 팔아 챙긴 두툼한 주머니를 가지고 부두 근처의 여관에서 어부들과 함께 술을 진창으로 마셔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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