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농약 듬뿍’ 바나나에 대한 추억

지금까지 필자는 아시아엔(The AsiaN) 독자들께 필리핀의 역사와 풍물 등에 대해 소개해 드렸다. 이번 호에선 그동안 소개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다음주부터는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의 삶의 현장들로 들어가보려 한다.

마젤란이 1521년 필리핀을 발견하여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방면에서 넘어온 말레이인과 중국 방면에서 넘어온 중국인들이 뒤섞여 살았다. 이들은 ‘바랑가이(barangay)’라는 족장 지배체제로 유지되며 인접 지역이나 인접 섬들과 거의 교류가 없는 원시공동체 사회를 유지하였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여 무역기지로 활용하면서부터 중국과 스페인의 상인들과 기술자들이 많이 유입되고 필리핀 현지인 지배 계층들과 활발한 혼혈이 이루어졌다.

현재 필리핀의 유력한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은 대부분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 시대의 지배계층 후예들이다. 한국인 또는 한국인 혼혈들이 외국에서 수백 년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들을 한국인이라고 불러야 하듯이, 필리핀의 지배층들도 스페인, 미국 또는 중국인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스페인, 미국 또는 중국인이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그러나 서민들은 그러한 자부심과 정체성이 부족하므로 한국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후진국) 필리핀 사람’으로 대하면 될 것이다. 인구는 최근 30년간 약 6000만명이 증가하여 2012년 기준 1억명이 넘었다. 15년마다 약 3000만명씩 증가한 셈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77년 4100만명, 1995년 6862만명, 1999년 7597만명, 2007년 8855만명, 2010년 9401만 명이던 인구가 이렇게 증가한 것이다.

가톨릭의 반대로 가족계획을 실행하지 않는 이러한 인구증가 추세가 계속되면 앞으로 10여년 후에는 남한 인구와 맞먹는 5000만명 정도가 늘어나, 총인구 1억5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필리핀은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기온 차이가 적은, 연평균 27도 정도의 열대권에 속해 있다. 기후도 지역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뚜렷하며(건기 11월~5월, 우기 6월~10월), 해마다 12월부터 2월까지 약 3개월 동안 무역풍(trade wind) 영향으로 바람이 잦다.

이 기간에는 민다나오 섬 위쪽에 위치한 필리핀의 거의 모든 지역이 건기인 상태에서 거의 매일 바람이 불기 때문에 일 년 중 상대적으로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 우기에는 거의 매주 태풍이 발생하므로 ‘태풍철’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대부분의 태풍은 민다나오섬의 동북부 해상에서 발생하여 서북쪽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민다나오섬은 연중 태풍의 영향이 거의 없으나 스콜현상이 잦고, 필리핀의 중·북부 지역은 태풍 영향으로 해마다 크고 작은 재해가 발생하곤 한다.

기후와 개발에 관한 연구를 하는 Germanwatch에서는, 1991년부터 2010년까지 기후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나라가 필리핀이라고 발표했다. 그 기간(20년) 동안 기후(태풍, 가뭄, 홍수 등)와 관련한 사망자수는 연평균 800명이 넘고, 피해액도 매년 6억6000만달러(약 6700억원)에 이른다고 했다.(Philippine Daily Inquirer, 2011.12.5)

이 지역에서 나오는 산물은 다른 지역에서도 나오고, 이 지역에 없는 산물은 다른 지역에도 거의 없다. 그리고 지역 또는 부족간 전쟁도 수백년간 거의 없다 보니, 지역간 인적, 물적 교류가 거의 없는 비교적 안정되고 고립된 정착생활이 계속됐다. 따라서 각 지역과 부족들은 그들 특유의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해 왔다. 현재에는 구조와 단어가 전혀 다른, 즉 양측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통역해주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한 70여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순으로는, Tagalog 27.6%, Cebuano 13.2%, Ilocano 9%, Bisaya 7.6%, Bicol 6%, Waray 3.2%(2000년도 통계), 이외 25% 정도의 인구는 이들 6개의 주요한 언어와도 전혀 다른 기타 60여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토착언어가 혼재하여 국민들 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므로, 미국 식민지 시절부터 토착언어 중 수도권(마닐라)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Tagalog와 식민 종주국 언어인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여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교육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모든 관공서의 서류들은 Tagalog 또는 영어로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필리핀을 대표하는 과일들은, 코코넛, 바나나, 파인애플이라 할 수 있다. 망고를 필리핀의 대표적인 과일이라 부르긴 하지만, 실제 재배량은 이 세 가지 과일들에 견줄 수가 없다. 망고는 필리핀뿐만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도 국가과일(National Fruit)로 정하고 있다. 망고의 세계 최대 생산국은 인도(연간 약 1360만톤)이고, 중국(연간 약 420만톤), 태국(연간 약 250만톤), 인도네시아(연간 약 220만톤), 멕시코(연간 약 190만톤), 파키스탄(연간 약 180만톤) 등이다. 이에 비해 필리핀의 망고 생산량은 연간 70만~80만톤 에 불과하다. 코코넛은 한해 약 2000만톤을 생산해 세계 최대를 자랑하며 전체 수출량의 약 6.7%에 이른다. 또 전체 농작물 수출의 50%가 코코넛 관련 상품이다. 필리핀 전체 농장의 약 30%(3만3,000㎢, 남한면적의 1/3 크기)가 코코넛 농장이고, 전 국민의 30% 가량이 코코넛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업종에서 생활하고 있다.

코코넛 농장의 농부들은 다른 작물의 농부들에 비해 저학력, 고연령, 저임금 수준이다. 1971년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인 코오앙코 (Danding Cojuangco, 전 코라손 아퀴노 대통령의 사촌 오빠이자 현 베니그노 아퀴노 대통령의 숙부, 필리핀 10대 거부 중 한명, 1935년~ ), 엔릴레(Juan Ponce Enrile, 전 국방부 장관이자 EDSA-I 혁명 당시 일등 공신, 현 상원의원, 1924년~ ) 등은 코코넛 재배 농민들에게 개발 확장과 수익 배분을 목적으로 Coco Levy Fund를 조성하였다. 조성된 막대한 펀드기금을 이들이 착복, 전용하여 은행을 설립하거나 필리핀 최대재벌이었던 San Miguel Corp의 주식을 사들이는데 전용했다는 의혹으로 큰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 펀드 규모는 1000억~1500억 페소(2조6000억 ~3조9000억원)로 알려져 있다. 코코넛 농민단체와의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열매의 밀크와 주스에는 섬유질과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오일은 다른 일반 오일과 달리 치료 효능이 있어서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라고도 불린다.

코코넛 오일에 함유되어 있는 중쇄지방산(medium chain fatty acids)은 지방 소화 흡수에 문제 있거나 열량 섭취를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효능이 있다. 콜레스테롤의 부정적 영향이 없고 동맥 경화와 심장질환 방지에 도움이 되며 유방암, 대장암과 다른 암 종양의 증식을 억제한다.

한편 필리핀의 지하수에는 석회질이 많이 섞여 있어서 요석증의 원인이 된다. 코코넛 주스에는 신장 결석을 용해시키는 성분이 들어있다. 그래서인지 필리핀 사람들 중에는 신장 결석 환자가 드물다. 또 칼슘, 마그네슘 흡수를 높이고 이와 뼈를 강하게 하여 골다공증을 방지한다. 코코넛은 인슐린분비와 혈당의 활용을 높여 당뇨 관련 증상의 완화를 돕는 한편 태양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고 주름살과 피부 노화를 방지해 주며, 건선, 습진, 피부병 관련 증상을 완화시킨다.

필리핀은 세계에서 2번째 바나나 생산국이며 바나나 수출 3위국이다. 민다나오섬에서 거의 대부분 재배하는데, 전체 재 배면적은 약 5만ha(500㎢, 서울시 면적의 90% 정도)이며, 2008년도에 14kg짜리 1억5000만개의 박스를 수출하였다. 바나나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필리핀 전체 수출에서 5번째이며, 민다나오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번째로 높다. 세계 최대 바나나 생산국은 인도(연간 2600만톤)이며, 필리핀(900만톤), 중국(820만톤), 에콰도르(760만톤), 브라질(720만톤), 인도네시아(630만톤)의 순이다. 필리핀 토종 바나나는 크기가 작았는데,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델몬테, 돌, 썬키스트, 스미토모)이 길고 큰 개량종을 들여와 재배하면서 농약을 살포하여 많은 농민들이 농약에 중독되기도 했다. 1986년 세계보건기구는 극히 위험한 수준의 해충 방제용 농약 Ethopro과 살충제 Chlorpyriphos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을 사용하여 바나나를 재배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필자는 1990년대 말 우연한 기회에 마닐라 남쪽의 재래시장에서 어느 바나나 상인을 알게 되었다. 시장 근처에 있는 방 2개짜리 허름한 집을 임대하여 창고로 쓰고 있었는데, 이른 새벽에 마닐라의 국내선 부두로 가서 아직 덜 익은 새파란 바나나를 지프니에 가득 사 가지고 임대한 창고에 넣어 두었다. 창고 정리가 끝나자 무슨 농약을 창고 안 가득히 뿌리고 문을 닫았다. 그 옆에 있는 창고를 열어보니 예쁘게 잘 익어있는 노란 바나나들이 가득 있었다. 그 날 오후부터 저녁까지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팔아야 되는 바나나들이었다. 궁금해 물으니 조금 전 그 농약을 치면 바나나가 고르게 익게 된다는 것이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익게 하면 고른 색이 나오지 않고 검은 반점이 드문드문 나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떨어지고 특히 외국인 손님들이 싫어한다나!

현지인 손님들은 농약을 치지 않은, 깔끔하지 않고 크기도 작으면서 값이 싼 바나나를 주로 산다고 하였다. 그 후 필자는 크고 길며 깔끔하게 익은 샛노란 바나나는 거들떠보지 않고, 작고 검은색 반점이 많아 못생긴 싸구려 바나나만 찾아서 먹는 좋은 버릇이 생겼다. 바나나는 식이섬유가 많아 다이어트에 좋고 장운동을 촉진시키므로 변비 제거 효능이 있으며 일반 과일보다 비타민 B6가 10배나 많다. 비타민 B6는 단백질 대사와 세포성장에 도움을 주고 신경계통과 면역계통 활동을 향상시켜준다. 칼륨이 혈관 내 과잉 나트륨을 제거해 주어 혈압을 정상화시켜주므로 고혈압, 뇌졸중, 동맥경화증, 심장병 등에 좋다. 바나나 100g에는 칼륨 380mg이 들어있어 하루 권장량보다 많다. 멜라토닌이 많아 마음을 안정시키고, 임산부들의 입덧을 완화시킨다. 항산화 작용을 하여 노화를 지연시킨다. 19세기 스페인 무역상들이 남미로부터 전래해 온 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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