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갈 길 먼 토지개혁···코라손 아퀴노 ‘개혁약속’ 물거품

필리핀의 경제적 사정에 따른 사회계층은 어떻게 분류하면 좋을까? 최저한의 영양을 갖춘 식사를 하루 세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돈을 모을 수도 없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가난을 ‘절대 빈곤’이라 하고, 절대 빈곤의 위치보다 훨씬 잘 사는 경우에도, 주위 사람들이 외식을 할 때, 휴양지로 휴가를 떠날 때, 고급 옷을 살 때, 좋은 차를 살 때 같이 따라할 수 없어서 보다 잘 사는 사람과 비교하여 느끼는 가난을 ‘상대 빈곤’이라 한다.

절대 빈곤층이 상대 빈곤을 느끼게 되려면 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수시로 눈에 띄는 곳에 살고 있어야 하고 같은 인종, 같은 민족, 같은 인간이라는 ‘동류’인식과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국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영국 사람들과 비교하여 상대 빈곤을 절실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 자체도 제대로 안 된다.

필리핀은 전체 국민 중 서민층이 약 90%(9천만명) 정도인데, 대체로 절대 빈곤층이 30%(약 3천만 명), 일반 서민층은 40%(약 4천만 명), 다소 여유 있는 서민층은 20%(약 2천만명) 정도다. 이들 계층들과 중산층(8%, 약 800만 명), 지배층(2%, 약 200만 명) 간에 상대 빈곤을 느끼게 되면 계층 간 시기와 질투가 유발되고 갈등이 생겨 사회가 불안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빈부 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계층간 상대 빈곤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시스템을 구축해 놓을 필요성이 있다. 필리핀의 경우 세 가지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는데, 교육, 종교 그리고 언론이다.

우선 교육. 상대적 빈곤의 이유를 개인의 동기 부족, 무절제, 게으름, 의타심의 탓으로 집중 교육하여 열등의식과 패배 의식을 고취시킨다. 무엇을 선택하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교육한다. 선택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주어진 결과에 대해 대체로 만족한다. 또는 나쁜 결과에 대해서도 “잊어버리자”고 쉽게 체념해 버리기 때문에 마음 속에 긴장(스트레스)과 갈등을 오래두지 않게 된다.

종교면에서 보면 얼마나 신의 뜻대로 사느냐에 따라 신이 인간에게 등급을 매겨 사후에 차별적인 보상을 해 주는 것이 당연하듯이, 자본주의의 현실사회에서도 (자본을) 투자한 만큼 부를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것과 그로 인한 빈부 격차는 당연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종교의 장점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고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 주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보수적인 판단을 하도록 도와준다.

언론에선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은 최대한 숨기고, 언론 매체를 통하여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행복한 삶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개발독재 시절의 한국에서도 지배층들은 그들만의 은밀한 장소에서 여대생들이나 연예인들을 불러 수시로 양주 파티를 벌였으나 철저히 숨겼었고, 서민들과 농민들 틈에 섞여 벌였던 막걸리 쇼는 언론에서 자주 보도하였던 것도 서민들이 상대 빈곤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자 했던 지배층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지배층들도 서민들 앞에 나설 때에는 현란하고 값비싼 옷 대신 격식을 차리지 않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착용함으로써 계급 없는 군중으로 뒤섞인 것처럼 보여준다.

1986년 EDSA 시민혁명의 도움으로 대통령에 오른 코라손 아퀴노는 원래 필리핀의 최상류층이자 10대 거부 중에 속하는 대지주 Cojoangco 가문의 딸이었다. 이러한 대지주/거부 가문의 딸이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 동안 집권 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겠다고 약속하니, 서민들과 농민들이 아퀴노를 지지했었고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1986년도의 EDSA 시민 혁명에 적극 참여했었던 것이다.

1987년 신속한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

그녀의 남편 아퀴노 상원 의원이 암살되기 전까지는 가정주부로만 활동했었기에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도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아퀴노 대통령의 친인척들과 측근들을 포함한 지배층들의 비협조로 토지개혁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1987년 2월, 수많은 농민들이 대통령궁 앞에서 진지하고 신속한 토지 개혁안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가 과격해지면서 경찰과 충돌하여 12명의 농민들이 숨지고 19명이 다치는 사태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아퀴노 정부는 종합적인 농지 개혁 프로그램(Comprehensive Agrarian Reform Program)을 마련하는 등 지주들과 농민들 사이를 조정하려는 성의를 보이는 듯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하나의 예로, 아퀴노 대통령의 친인척이 소유하고 있던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인 Hacienda Luisita의 토지 분배는 농민들과의 협상에 문제가 생겨 2004년부터 줄곧 폭력사태가 벌어져 왔다.

?2004년 11월 16일 이 농장에서 농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12명의 농민들과 2명의 아이들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2004년 12월 8일, 두 명의 농민 노조 활동가가 무장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2005년 3월 3일, 농민 노조를 지원하던 시의원 한명이 무장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2005년 3월 4일, 농민 노조 지도자 한명이 무장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2005년 3월 13일, 파업 중인 농민 노조원들에게 식사 제공한 가톨릭 신부가 무장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2005년 10월 25일 저녁, 노동부로부터 노조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아낸 것을 축하하는 뒤뜰 회식자리에서 노조 지도자 Ricardo Ramos씨가 무장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2006년 농민들에게 토지를 불하하라는 토지개혁부(Department of Agrarian Reform)의 결정이 내려졌다.

2004년 11월 Luicita Hajienda에서의 농민들 시위현장

Hacienda Luisita는 6453헥타르 사탕수수 농장으로 면적은 64.35㎢이다. 이는 서울의 약 1/10 또는 완도 섬 전체의 면적(62.6㎢)과 비슷하거나 서울시 노원구(35.42㎢)와 은평구(29.41㎢)를 합한 면적과 비슷하다. 5000여명의 농민들이 경작하고 있으며, 아퀴노 전 대통령의 친정이자 현 대통령 Benigno Aquino의 외가인 Cojuangco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1881년 스페인 담배회사인 Tabacalera(1636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담배 제조회사)에 의해 설립된 농장으로, 이 회사는 필리핀 전역에 많은 담배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을 설립했다.

식민지 경영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로도 미국 측 유대 관계를 강화하여 미국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설탕의 최대 20%까지 공급하였다. 일본의 점령기에도 태평양 전쟁 발발하기 이전부터 농장에서 고용되어 일해 왔던 일본인들을 이용하여 일본 측과 협력하며 설탕 생산에는 차질을 빚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인 중간 관리자들 밑에 많은 중국인 피난민들과 한국인들을 고용하였다. 1950년 농장의 소유권 매각이 논의되고 있을 때,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당시 필리핀에서 최고 갑부 가문 중 하나였으며 세부와 필리핀 중부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가였던 Lopez 가문에게 매각되면 거부들간의 세력 균형이 깨어질 것을 우려하여, Lopez 가문을 차단하고 신흥 부유층이었던 Cojuangco 가문(스페인-중국 혼혈계)에 매각되도록 조정하였다.

1958년 이 농장을 확보한 Cojuangco 가문은 그 후 은행과 운수 사업 및 통신 사업(PLDT, 한국의 KT에 해당)에서 크게 부를 확대하였으나, 마르코스 치하에서는 정권과 줄타기를 하였다. Pepe Cojuangco의 사위 Ninoy Aquino 상원 의원(코라손 아퀴노 전 대통령의 남편)은 마르코스 대통령과 적대적이었는데 반해, 조카 Danding Cojuanco는 마르코스 대통령과 절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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