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역사인물 7인···④ 그링고 호나산 ‘쿠데타 주역’서 ‘상원의원’으로

그레고리오 바예스테로스 호나산 2세(Gregorio Ballesteros Honasan II)를 빼놓고는 필리핀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1948년 3월14일 바귀오에서 출생했다. 그는 그링고 호나산(Gringo Honasan)으로 더 잘 알려진 전직 직업군인이자 상원의원이다. 대만 유학 후 1971년 ‘최우수지도자상’을 받고 필리핀군사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군대 내 비밀 사조직인 군개혁운동(Reform the Armed Forces Movement, RAM) 지도자였다.

RAM은 1971년, 1972년, 1978년 사관학교 기수들이 주로 참여해 군대 내 만연해 있던 정치후원(patronage politics)과 부패(corruption) 제거를 목표로 호나산이 주도하여 만들었다. 마르코스 정권 시절 계엄령기간(1972~1981) 조직이 크게 확장되었다. 1986년 EDSA 시민혁명 때는 초기에 대통령궁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시민들과 반정부편에 서서 마르코스 대통령을 축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나산은 마르코스 정권 시절의 국방장관이었던 후안 폰세 엔릴레(Juan Ponce Enrile)의 경호대장이었으며, 1986년 코라손 아퀴노 정부로부터 1차 EDSA 시민혁명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코라손 아퀴노 정부의 무능과 국민들에 대한 토지개혁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RAM을 이끌고 6번에 걸친 쿠데타를 주도했다. 1992년 당선된 라모스 대통령과의 사면 협상에 응하여 은신처에서 나온 후, 1995년 임기 6년의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2001년 재선, 2007년 3선에 당선되었다. 호나산이 주도했거나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살펴보자.

1. 1986년 7월6일, 490여명의 군인과 마르코스 전 정권을 지지하는 1만5000명의 시민들이 마닐라호텔 점거. 36시간의 점거 끝에 사상자 없이 자진 해산.

2. 1986년 11월22일, 국방장관 엔릴레와 호나산의 RAM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어 군 병력이 쿠데타군 포위, 사고나 마찰 없이 군 병영으로 이동시킴. 아퀴노 대통령은 엔릴레 국방장관을 해임하였으나 이듬해 엘릴레는 상원의원에 당선.

3. 1987년 1월 27~28일. 100여명의 군인들이 방송국(GMA-7) 점거, 일부 군인들은 공군기지 점거를 시도했으나 실패. 쿠데타군 1명 사망, 35명 부상으로 쿠데타 실패.

4. 1987년 4월18일. 56명의 쿠데타 군인들이 육군본부를 공격했으나 즉각적인 반격을 받아 실패. 쿠데타군 1명 사망.

5. 1987년 8월28일, 호나산(당시 대령, 39세)의 명령으로 쿠데타군이 마닐라 소재 공군기지 일부와 방송국 3곳, 지방의 군사기지 3곳 장악. 호나산 자신은 쿠데타군의 일부를 직접 지휘하며 육군본부와 국방부 일부 장악. 12시간 만에 정부군에 의해 패퇴. 비무장시민 포함 53명 사망. 200여명 부상.

아퀴노 대통령은 쿠데타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던 라모스를 국방장관으로 임명. 아퀴노 대통령은 쿠데타군이 대통령궁을 공격하였을 당시 대통령이 침대 밑에 숨어있었다는 폭로기사를 쓴 유력일간지의 여성 논설위원이자 칼럼리스트 루이 벨트란(Louie Beltran)을 고소.

벨트란은 2년의 징역형과 2백만페소 벌금형을 선고(1992년)받았으나 1997년 항소심에서 사후(死後) 승소. 그녀는 1994년 심장마비로 58살 나이로 사망.

호나산은 쿠데타 실패 후 체포되어 육군본부 안에 있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며칠 후 간수들과 함께 도주. 몇 주 후 다시 체포되어 마닐라만에 떠 있는 해군함정에 수감됨. 이번에는 당시 라모스 국방장관(후일 대통령 당선)이 신임하고 있던 군인들로만 뽑아 지키게 하였으나, 며칠 후 일부 군인들과 함께 도주하여 잠적.

이 사건으로 필리핀 군대 내에 RAM의 비밀조직이 얼마나 치밀하고 광범위한지, 그리고 호나산의 조직관리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필리핀 국민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 줌. 라모스 국방장관조차도 RAM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 훗날 라모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호나산측과의 평화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

5. 1989년 1월5일, 일단의 쿠데타군들이 잠보앙가(Zamboanga)시 소재 군부대 점령. 며칠 후 정부군 폭격과 공격으로 군부대 시설 붕괴, 에두아르도 바탈리아(Eduardo Batallia) 장군을 포함한 7명 사망.

6. 1989년 12월1일, 잠적하여 수배 중이던 호나산 대령과 에드가르도 아베니나(Edgardo Abenina) 현역장군, 호세 마 주멜(Jose Ma Zumel) 퇴역장군 주도로 3000명 이상의 쿠데타군이 마닐라의 공군기지, 육군본부와 방송국 그리고 세부의 공군기지 장악. 마닐라 시내 22개의 고층빌딩 점거.

쿠데타군은 공군기와 헬기를 동원하여 대통령궁을 공격했으며, 정부군의 열세와 소극적인 대응으로 위기에 빠진 아퀴노 대통령은 레이건 미대통령에게 지원 호소. 필리핀 정부군 지원에 나선 미 공군기들이 마닐라 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여 쿠데타에 참여한 공군기 3대를 격추하고, 지상에서는 120여명의 미 해병대원들이 정부군을 지원하며 쿠데타군과 시가전. 2척의 미 항공모함도 마닐라 인근 해역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12월9일 쿠데타군 항복.

공식적으로는 사망 99명(민간인 포함), 부상 570명. 1986년도 EDSA 시민혁명 때 아퀴노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던 수많은 시민들이 이번에는 대부분 집안에 머물며 관망. 아퀴노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심판하겠다는 명분의 쿠데타군을 심적으로 지지.

7. 아베니나(Abenina) 장군은 1990년 1월28일 체포되어 수년간 수형생활 후 아로요(Arroyo) 정부에서 내무부차관, 교통부장관 역임. 호나산은 쿠데타 실패 후 또다시 잠적.

국민의 지지를 잃은 필리핀 정부의 리더십 불안은 호나산의 신출귀몰하는 쿠데타를 수시로 불러온 것이다. 필리핀 현대사의 비극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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