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역사인물 7인···② 호세리잘과 보니파시오

우리는 지난 글에서 마젤란과 레가스피 초대 총독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과 보니파시오를 비교하면서 독자들게 찾아가려 한다. 이들은 모두 필리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영웅이지만, 사상과 접근방법이 달라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은 1861년 상류층 지주 출신 가정에서 11남매 중 7남으로 태어났다.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아테네오대학과 산토토마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82년 스페인의 마드리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필리핀 식민지 개혁을 요구하는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31살 때인 1892년 마닐라에서 필리핀민족동맹을 조직, 스페인 식민당국에 대해 비폭력저항운동 및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민다나오 다피탄섬으로 유배됐다. 35살때인 1896년 12월, 무장독립투쟁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돼 12월30일 마닐라에서 공개처형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호세 리잘의 정치강령이다. 이에 따르면 1)필리핀을 스페인의 한 주로 통합하고 스페인 국회에 대표자를 파견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2)스페인 탁발수사를 필리핀 탁발수사로 교체할 것 3)집회·결사의 자유와 필리핀인이 스페인인과 동등한 법적인 권리를 보장할 것 등이다. 그의 비폭력저항운동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처형 하루 전 면회 온 여동생에게 주었다는, 시 ‘마지막 이별’의 첫 절과 마지막 절이다.

“잘 있거라, 내 연모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영토여
내 슬프고 억압된 목숨을 내 너 위해 바치리니
오로지 네 생명이 더 밝고 신선하고 축복된다면
나는 너의 복지를 위해
나의 생명을 최후까지 바치리니
(중략)
안녕! 설움의 땅에 남은 부모님이여, 형제들이여.
내 사랑했던 연인이여, 내 어릴 적 친구들이여
이 피곤한 생에서 내가 휴식하게 됨을 기꺼워 해 달라.
잘 있거라. 친절했던 나그네여, 내 길 밝혀주던 친구여
잘 있거라. 내 모든 사랑했던 이들이여.
죽음은 곧 휴식일지니.”

보니파시오 (Andres Bonifacio, 1863~1897)

‘위대한 평민’ 또는 ‘필리핀혁명의 아버지’이라 불리는 필리핀 독립영웅인 그는 무장투쟁단체 카티푸난을 창설하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혁명을 주도하였다. 역사가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재단사인 부친과 담배 공장 노동자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를 대신하여 어린 형제들을 부양하기 위해 정규교육을 중단해야 했다. 통조림이나 부채를 만들어 팔기도 하였으며 10대 후반기에는 무역회사와 단역 배우로 일했다. 독학으로 프랑스혁명에 관한 책들과 미국 대통령 전기, 필리핀 법률 책을 탐독했다.

프리메이슨(숙련석공 조합원)의 일원이었으며 1892년 리잘의 La Liga Filipina(스페인 식민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비폭력저항 단체)에 참여했으나 리잘이 체포되어 민다나오섬으로 유배간 다음날 카티푸난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비밀결사단체이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추구하였다.

부유하고 보수적인 독립운동가들은 호세 리잘이 주창한 평화적인 개혁에 지지를 보낸데 반해, 가난하고 급진적인 독립운동가들은 보니파시오의 무장투쟁론을 지지하고 카티푸난에 합류하였다. 초기에는 남성들만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여성들도 받아 보니파시오의 아내 그레고리아 데 제수스(Gregoria de Jesus)가 카티푸난지도자들 그룹에 포함되기도 했다.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의 선전지에 글과 시를 실었다. 카티푸난운동은 초기였던 1896년 1월 주로 마닐라 주변의 루손섬에서 300명의 조직원이었던 것이 그해 8월에는 필리핀 전역에서 4만여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1896년 5월6일, 식민당국의 감시를 뚫고 마닐라에서 카티푸난비밀회의가 열리던 날, 보니파시오는 최대한 빨리 봉기하기를 주장하였던데 반해 마닐라 남쪽 카비테(Cavite) 지역 책임자였던 아귀날도는 무기 부족을 이유로 봉기를 미루자고 주장했다.

1896년 8월19일, 카티푸난의 존재를 눈치 챈 스페인 식민정부는 수백 명의 조직원과 시민들을 반역 혐의로 체포하였다. 때 마침 스페인 식민당국 허가를 받고 쿠바로 떠나려고 마닐라에 기항중인 배에 승선하고 있던 리잘을 보니파시오의 동지들(에밀리오 하신토 Emilio Jacinto와 기예르모 마상카이 Guillermo Masangkay)이 만나 즉각적인 무장봉기를 설득하였으나, 리잘은 거절하였다. 그 후 리잘은 카티푸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스페인 식민당국에 체포되어 그해 12월 처형당했다.

스페인 식민당국의 대대적인 검거 열풍 속에 보니파시오는 1896년 8월28일 혁명정부를 구성하여 대통령 겸 혁명군 참모총장에 취임했으며, 8월29일 전국의 조직원들에게 무장봉기하여 스페인군에게 대항하라고 지시했다.

“모든 이에게 이 매니페스토(Manifesto, 대중에게 밝히는 확고한 정치적 의도와 견해)를 보내는 바이다. 이 나라의 자식들이 감옥에서 고문과 처절한 학대를 받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중지시켜야 하겠기에 우리의 합의에 따라 혁명이 시작됨을 형제(회원)들에게 알리도록 하라. 이를 위해, 모든 마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마닐라를 공격할 필요가 있다. 이 성스러운 국민의 이상(혁명)을 방해하는 자는, 병자와 불구자인 경우를 제외하고 누구든지 반역자 그리고 적으로 간주될 것이다”-1896년 8월28일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마닐라와 인근 마을 곳곳에서 카티푸난 독립군들과 스페인 식민군사들 간에 교전이 벌어졌으나 화기의 열세로 보니파시오는 산악지역으로 후퇴하면서 게릴라전술을 펴며 저항했다. 스페인 식민 군사들과 독립군들 간의 전쟁이 몇 달째 계속되는 동안, 카티푸난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특히 상류계급 출신이며 중국계인 아귀날도가 보니파시오의 지도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전투를 지원하지 않았다.

1896년 말, 보니파시오와 혁명군들은 양 진영의 관계개선 및 아귀날도측에 대한 전투지원을 위해 까비떼 지역에 있는 아귀날도의 근거지를 찾아갔지만 스페인과의 평화협상을 주장하는 아귀날도 진영과 오히려 관계가 악화되어 버렸다. 더욱이 까비떼 지역에서는 보니파시오의 낮은 출신성분과 학력을 문제삼아 혁명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부적합하다는 소문과 글들이 퍼지고 있었다.

1897년 3월22일, 양측의 혁명지도자들이 모여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보니파시오측을 지지하는 지역대표들의 수적 열세로 아귀날도가 1등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보니파시오 진영은 여러 가지 부정선거의 증거를 대며 선거무효를 선언하였다. 아귀날도측은 보니파시오측의 입장을 통제하고 아귀날도측의 병력만이 경비를 서게 한 예배당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강행하였다.

4월 말, 보니파시오측이 까비떼를 떠나려고 준비하던 중, 아귀날도측 장군 두 명과 병력들이 체포하려는 목적을 숨긴 채 보니파시오를 방문하였고, 그들을 환대했던 보니파시오의 남동생을 포함한 측근 장군들과 병사들은 다음날 살해되었다. 보니파시오 역시 부상당한 채 체포되었으며, 그의 아내는 아귀날도측 장군한테 겁탈당했다고 전해진다. 아귀날도 진영 만의 재판관들로 구성된 판결에서 보니파시오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897년 5월10일 처형되었다.

보니파시오의 처형 이후, 까비떼 전선에 지원을 나왔던 거의 모든 타 지역의 카피푸난 혁명군들은 아귀날도에 환멸을 느껴 조직을 떠났고, 보니파시오를 지했던 살아남은 카피푸난 장군들(Emilio Jacinto, Artemio Ricarte 등)은 그후 다시는 아귀날도 진영과 협조하지 않았다. 만일 보니파시오가 테헤로스 선거(Tejeros Election) 이후 아귀날도의 근거지였던 까비떼를 무사히 빠져 나왔더라면, 오히려 아귀날도를 반역죄로 법정에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필리핀의 비주류 역사학자들은, 보니파시오에 대한 판결과 처형은 정치적 목적에 의한 사법살인(legal murder)이었고, 필리핀 최초의 대통령은 아귀날도가 아닌 보니파시오이며, 필리핀 최고의 영웅도 호세 리잘이 아닌 보니파시오라고 주장한다. 호세 리잘은 미국 식민정부의 교육정책(부당한 처우에 대해서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평화적인 절차에 따라서 주장하도록 하는)에 입각하여 후원받고 지명된 영웅이라는 것이다.

여느 학자들은, 보니파시오 진영과 아귀날도 진영 간의 주도권 다툼은 중류층 또는 서민층을 대변하는 보니파시오 세력이 상류층을 대변하는 아귀날도 세력에게 패배한 싸움이었다고 평가한다. 또는 식민지배 세력에 대항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혁명(revolution, radical resistance. 進步)을 추구했던 보니파시오 세력이 개혁(reform, peaceful political advocacy. 保守)을 주장했던 아귀날도 세력에게 패배한 싸움이었고 평가한다.

필리핀인들은 매년 11월30일을 ‘보니파시오의 날’, 12월30일은 ‘리잘의 날’로 정하여 공휴일로서 추모하고 있으며, 아직도 호세 리잘은 대다수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고 있다.

호세 리잘과 앙드레 보니파시오가 활동하던 시기의 세계상황을 살펴보자.

1861년 러시아 알렉산더 2세, 농노제 폐지. 미국 남북전쟁 발발.
1864년 한국 대원군 집정. 미국 링컨대통령 재선.
1865년 미국, 링컨 대통령 암살(4월), 남북전쟁 종료(6월).
1867년 일본 메이지유신, 왕정이 회복되고 입헌정치 시작. 러시아, 재정궁핍으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720만달러에 매각, 캐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 필리핀 지배층과 스페인 귀족층들의 왕래가 수월해지고 활발해짐.
1877넌 영국, 인도 합병.
1878년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 개설, 한국 최초의 은행.
1887년 한국 최초의 석탄 화력발전소 가동.
1889년 천공카드 시스템에 의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발명.
1894년 동학혁명 발발.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하자 일본도 군사를 보내 개입하면서 청일전쟁 발발. 미국의 에디슨은 최초의 영사기 발명.
1897년 한성은행 설립(조흥은행의 전신), 한국 최초의 민족자본 은행, 최초의 주식회사.
1898년 필리핀, 괌, 하와이 미국 식민지로 편입됨.

One comment

  1. 필리핀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평화운동가이며 또 독립운동가인 리잘과 보니파시우에 대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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