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지배층 암투는 ‘서부활극’ 그 자체

1987년 EDSA 시민혁명 당시 모습 <자료사진=위키피디아>

마젤란의 필리핀 상륙 이후 스페인 사람들은 토착지배 계층을 형성해 370여년간 통치하면서 토착 인디언들에 대한 대량 학살과 토지 강탈같은 흉악 범죄 행위는 거의 벌이지 않았다. 따라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은 없으며 기독교 전파에 따른 정신적 교화(세뇌)에 의해 아시아에서 다른 나라보다 일찍 문명화되었다며 오히려 고마워한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하던 시기에 농민/서민층(피지배층)을 대변하는 보니파시오 장군측과 부유층(지배층)을 대변하는 아귀날도 장군측의 주도권 싸움에서 보니파시오 측이 패함으로써, 부와 권력이 식민시대 지배층으로부터 피지배층으로 물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독립운동 시기 이후에도 계속 주도권을 잡은 지배층들은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세력에 타협하여 부(토지)와 권력을 확대하면서 계층간 격차를 더욱 벌여 놓았다. 미국으로부터 독립 이후에도 지배층 지위는 확고해졌으며 1998년 서민 배우 출신의 에스트라다가 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일부분 서민들을 위한 좌파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과 필리핀 부유층(지배층)들이 설계한 우익 쿠데타로 인해 겨우 2년여 만에 물러나게 되었다.

에스트라다를 밀어낸 지배층들은 보다 강화된 친미정책과 극단적인 자본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 전쟁’을 빌미로 수백명의 언론계, 노동계 인사들이 살해되거나 박해받는 데에 대해 방임하였고, 공교육과 국가의료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대폭 삭감했을 뿐 아니라 소비자(서민)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부가세 확대 정책을 시행하여 빈부격차를 더욱 확대시켰다. 1987년 EDSA 시민혁명 후 개정된 헌법에 의해 대통령과 부통령은 6년 단임제이다. 상원의원 24명은 6년 임기에 중임이 가능하며, 하원의원(212명 선거구에서 선출, 24명 정당명부제)은 3년 임기로 세번까지 연임이 가능하다. 부와 권력을 이미 확보한 (기득권층) 소수 엘리트가 대통령의 교체와는 상관없이 정치권을 지속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정강이나 정책 위주의 정당정치가 어렵고, 상황에 따라 인물 위주로 정치인들이 이합집산 한다.

1991년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어 중앙정부로부터 조세권을 비롯하여 일부 권한을 양도받아 토후세력들은 각 지역에서 중세시대의 영주처럼 통치하고 생활한다. 각 지역 사업의 인·허가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가장 이윤이 많이 나는 사업들을 정치가 가문이 직접 운영하는 경우가 많고(정경일치의 사회), 정치적으로 반대편인 사업가들은 그 지역에서 사업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목숨을 건 선거운동이 펼쳐지기도 한다.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인 선거운동 방법은 상대후보를 암살하는 것이라는 섬뜩한 농담도 흔하게 회자되는 필리핀의 정치 문화이다. 정치를 하려면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후보를 암살하기 위해 또는 상대후보의 불법선거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사병들과 여러 가지 사조직을 갖춰야만 하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어느 지역이든지 비슷한 재력을 갖춘 사람들은 같은 가문이거나 비슷한 계층들뿐이다.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아버지와 아들이 경쟁하거나 사촌들 사이에서, 친척들 사이에서 또는 한때의 동업자들 사이에서 경쟁하면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

필리핀 지배층들의 부와 권력에 대한 다툼은 미국의 서부활극(wild-west) 영화나 대부(the Godfather)같은 갱영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다이나믹할 때가 있다. 서민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배층들의 암투를 영화 감상하듯이 방관자 입장에서 지켜만 보고 있기 때문에 필리핀의 정치문화는 당분간 변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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