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1986 시민혁명’ 불길 치솟다①

우리는 1986년 2월22일부터 나흘간의 필리핀 시민혁명(EDSA)을 잊을 수 없다. 20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하여 마르코스 정권의 독재와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벌인 평화적인 시위를 말한다. 대통령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1917~1989)는 1973년 치러질 대선에서 3선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1972년 9월23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14년 간 재임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도 박정희 정부는 1972년 10월17일 게엄령을 선포하고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제3공화국의 헌정을 중단시키고 헌법을 유린하였다)

당시는 전 세계적인 냉전기간(Cold War)이었으므로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과 국내에 있는 미군들의 기지 사용에 대한 대가로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마르코스 집권 초기에는 전임 대통령들보다 훨씬 많은 도로를 건설하고 학교를 지어 인기를 유지했으나, 중·후반기에는 측근들과 일부 부유층들에게 경제적인 특혜를 베풀고 국민들의 빈부 격차를 크게 벌여 놓아 범죄율이 크게 상승하였고, 부의 재분배와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공산반군(New Peoples Army, NPA)의 활동을 자극하였다. 또 민다나오섬에서는 이슬람 반군들의 분리독립운동이 격화되었다.

마르코스 정권에 반대하여 1980년 미국으로 추방되었던 아퀴노(Benigno ‘Ninoy’Aquino, Jr.1932~1983) 상원의원은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1983년 8월21일 귀국하였으나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피살되었다. 많은 시민들과 정치인들이 크게 동요하였고 군대 내 마르코스 정권에 반대하는 비밀 사조직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암살 사건 2년 뒤인 1985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마르코스는 이듬해(1986) 특별대선(snap election)을 치르겠다고 선언하였고, 암살된 아퀴노 상원의원의 미망인 코라손 아퀴노가 야당 단일후보로 출마하였다.

1986년 2월7일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고 전국에서 투표권 매입,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선거 행위들이 고발되었다. 개표가 시작되자 선관위에서는 마르코스가 앞서는 것으로, 민간인으로 구성된 ‘전국자유선거운동(National Movement for Free Elections)’에서는 코라손 아퀴노가 앞서는 것으로 집계하였다. 1986년 2월9일, 29명의 선관위 전산 기술자들이 부정개표 및 투표조작에 항의하며 파업하였고 1986년 2월11일, 야당 측 인사였던 Antique주의 전 주지사가 개표가 실시되고 있던 주청사 앞에서 살해되었다. 1986년 2월14일, 서로 다른 두 개의 조직에서 대선 개표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선관위는 마르코스 10,807,197표, 코라손 아퀴노 9,291,761표로 마르코스가 승리했다고 발표한데 반해, ‘전국자유선거운동’은 마르코스 7,053,068표, 코라손 아퀴노 7,835,070표로 아퀴노 여사가 승리했다고 발표하였다.

1986년 2월15일, 여당과 야당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 야당과 아퀴노측은 마르코스 측근들이 운영하는 은행과 언론 매체 및 사업장에 대해 파업을 호소하여 많은 국민들이 호응하였다.

1986년 2월22일 새벽, 군대 내 비밀 사조직 RAM 지도자들과 국방장관 Juan Ponce Enrile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대통령궁 공격 및 대통령 체포방안을 협의하였다. 당일 오후 쿠데타 계획을 인지한 마르코스 측은 엔릴레 국방 장관과 호나산 대령을 포함한 RAM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쿠데타를 모의했던 혁명군 지도자들의 멘토였던 당시 국방장관 Enrile는 당시 참모부총장이자 경찰총장이었던 Fidel Ramos을 설득하여 쿠데타군 측 및 야당측에 가담하도록 했다.

오후 6시 반경, 엔릴레와 라모스는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 보직 사퇴 및 반마르코스 전선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했다. 저녁 9시경 Sin 추기경이 Radio Veritas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혁명군 측에 서서 경찰본부와 육군본부 사이에 있는 EDSA 거리에 모일 것을 호소했다. 이에 대해 후일 UP대학총장 Francisco Nemenzo은 “라디오 Veritas 방송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몇 시간 만에 수백 만명의 군중들을 움직이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더라도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Without Radio Veritas, it would have been difficult, if not impossible, to mobilize millions of people in a matter of hours.”)

EDSA(Epifanio delos Santos Avenue)의 시위현장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사진=Wikimedia/Joey de Vera>

정부군은 다음날 Radio Veritas의 주 송신탑을 제거하였으나, 방송국 직원들은 임시 송신탑을 설치하여 지속적으로 소식을 전했으며,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EDSA 거리에 운집하여 나무와 차량, 샌드백 등으로 바리게이트를 치기 시작했다. 신부와 수녀들은 기도회를 주도하고 가수들은 80년대 이후 저항을 상징했던 노래 ‘Bayan Ko(My Homeland)’의 철자를 바꾼 ‘Laban Ko(My Fighting)’을 부르며 시민들의 저항의지를 고취시켰다.

1986년 2월23일 오후, 엔릴레가 EDSA의 시위현장에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호 속에 도착했고, Radio Veritas가 시위 진압을 위해 장갑차들이 출동했음을 알리자, 수천 명의 시민들이 장갑차 진입로로 이동하여 맨몸으로 막아섰고 정부군은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않은 채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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