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서민층③···’현지처’ 얻었다간 일가친척 다 책임져야
한국인들에게 시집가는 필리핀 여자들에 대한 얘기를 가끔 듣는다. 서민층 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갈 때엔 그녀 자신과 친정 식구들, 친척들이 모두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거지 근성이라기보다는 좀 더 여유 있고 좀 더 재물을 많이 모아놓은 사람은 그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이 당연한 필리핀의 서민 문화이기 때문에, 친정보다 잘사는 한국 시댁에서 도와주고 나눠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느 서민 출신 아가씨도 나이 40이 넘도록 장가를 못간 가난하고 키 작고 형제 많은 운전기사(필자의 한국 거래처 사장의 운전기사였다)와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신랑이 매월 500달러 정도씩 친정에 보내준다며 아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만일 한국인 남편이나 시댁이 필리핀 아내의 친정에 정기적으로 (매달) 얼마간의 금액이라도 송금하지 않으면, 필리핀 아내는 상심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한국인 남편 때문에 죽은 후 지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가정생활이 순탄하지는 못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필리핀 사회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산층이었던 현재의 아내와 결혼했었다. 처가댁은 당시 필자가 세 들어 살았던 집의 주인이었고 변호사였는데, 청혼을 하자 처가 측에서 반대가 심했었다.(자기 집에 세 들어 살 정도로) 가난한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 7년 간 주인집 식구들과 정을 쌓아 왔었고 신뢰를 구축해 놓았었지만 (그집에 총각으로 혼자 세 들어 사는 동안 한 번도 다른 여자와 데이트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니, 들킨 적이 없었다고 해야 진실이다!) 설득이 쉽지 않았다. 한국에 계시면서 후진국 처녀와 국제결혼 하겠다는 5남매의 장남인 필자의 계획을 완강히 반대하시던 필자의 부모님까지 모시고 와서야 최종적으로 양가 부모님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중산층인 처가 친척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한때 가난하다고 괄시했던) 필자에게 부탁을 해 온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항상 그들 나름대로 여유롭게 살고 있기 때문에 부탁할 이유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 사람들이 1694명이고 외국인과의 결혼에 있어서 4번째 순위였다. 한국인보다 많은 국제결혼 상대는 미국인 9411명, 일본인 2698명, 캐나다인 1089명이다. 수년 전, 가까이 지내던 50대 초반의 한국인 사업가 A사장이 있었다. 마닐라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출장을 자주 왔는데, 매달 일주일 정도 마닐라에 머물곤 했었다. A사장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창녀들을 꺼려했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사귈 수 있는 참한 아가씨 한 명 소개시켜 달라고 졸랐다. 한국에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현지처’를 원하는 것이었는데, 가난한 학생이라면 학비와 생활비를 도와주며 후일 A사장의 사업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여러 번 진지하게 부탁해서 필자 주위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솔직한 사정 얘기를 하고 기다렸으나 한 명도 소개받지 못했었다. 두세 달 후 어느 날 A사장에게서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옆에 정말로 참한 필리핀 아가씨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술집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돈이 궁해 학업을 중단한 아가씨라는데 A사장과 사귀기로 하였고 조만간 아가씨가 거주할 방을 구하고 학교도 복학할 것이라 했다. 두 사람은 진실로 만족해하고 행복해 보였다. 다시 그로부터 몇 달 후 A사장을 만났는데 고민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 아가씨 때문이라 했고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처음 사귈 때와 살림을 차렸을 때만 해도 학비와 생활비, 용돈 등을 합해서 월 100만 원 정도면 여유 있는 생활은 아닐지라도 무난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현재 매월 300만원 이상이 들어 간다. 처음엔 아가씨 씀씀이가 너무 헤픈 것인지, 혹시 몰래 필리핀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인지 의심했었다. 그런데 좀 더 살아가면서 직접 겪어보고 많은 대화를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동거하기로 합의하고 원룸 아파트를 하나 임대한 후, 아가씨가 자기 부모와 가까운 친척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생활비가 늘어난 이유는, 첫째, 학생 신분의 사촌들과 조카들이 A사장이 한국에 가 있는 동안에는 그 집에 와서 함께 생활했다. 도회지에 사는 친척집에 시골 학생들이 머물며 신세 지는 것은 한국의 50년대~70년대에도 그러했으니 이해한다. 둘째, 부모형제와 가까운 친척들이 예전 같으면 참아 내거나 민간요법으로 치료했을 병들이 걸렸을 때 이제는 병원에 자주 간다. 도와주지 않으면 퇴원이 안 되기 때문에 병원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아가씨 자신의 허영이나 A사장을 속이는 짓을 하느라 생활비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가난한 부모형제와 친척들을 돕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A사장의 고민은 아가씨가 착하고 순수한 것은 좋은데, 아가씨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평생 돌봐줘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고 싫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사정이 원치 않는 쪽으로 변하고 있으니 아가씨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도 줄어들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 들어와 생활한지 십년이 넘었어도 알지 못했었던, A사장을 통해서 비로소 엿보게 된 필리핀 서민들의 진실된 삶이었다. 그 후, 서민들과 사귀려는 한국인들을 만나면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얘기해주는 몇 가지 사항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A사장과는 그로부터 얼마 후 2008년도 세계금융위기를 맞아 한국의 사업에 열중하겠다며 마닐라 사무실을 폐쇄해서 돌아간 뒤로 연락이 두절되어서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필리핀의 지배층들은 가난한 서민들 중에서 첩으로 골라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지방의 어느 나이 많은 주지사는 알려진 첩들만 3명이라 하고 10명 이상의 서자들이 있다고 하는데, 첩들과 성장한 서자(child of concubine)들 모두에게 1인당 매달 30만 페소(약 780만원)씩 생활비를 주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부터 첩이 되고자 꿈꾸는 젊은 서민 여성들은 거의 없을 터이지만, 부유한 사람들의 첩이 되고자 마음먹었을 때 남자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 정도의 경제적인 능력이 되지 않거나 배려심이 없는 사람은 애초에 첩을 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필리핀 사회의 통념일 것이다. 부자들은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자기들 흉내 내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니, 어중간한 부자들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정도의 파격적인 대우를 첩들에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