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지구상 최상위권 서민여성들 생활력

필리핀에서는 여성의 지위와 생활력이 남성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특히 서민층에서는 여성들의 책임 의식이 훨씬 강해서 많은 회사들이 여성 관리자들 밑에 남성 직원들을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 종교의 영향이다. 필리핀 서민들에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하느님이라고 대답한다. 하느님과 예수님, 성모마리아에 대한 관념이 너무 커서인지, 남편으로서의 요셉은 존재감이 별로 없는 듯하다. 가정에서 자식의 탄생에 대한 개념도 신과 아내의 역할이 우선시되고 남편(아버지)은 보조역이다. 그래서인지 남편(아버지)보다 아내(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한국의 여성(어머니)들보다 훨씬 강하다. 부부가 별거하게 되면 아내가 자식들을 맡는 경우가 95% 이상이다.

20여 년 전 어떤 수출 아이템을 주문 제작하기 위해 시골 마을에서 보름 이상 머물곤 하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작은 잔치가 있다고 해서 초대를 받아 갔는데, 아직 돌이 안됐음직한 애기의 세례식(blessing)을 하고 있었다. 기쁨과 행복에 넘쳐 보이는 젊은 엄마 품에 든 애기를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축복해주고 예뻐해 주었다. 그런데 애기의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물어 보았더니, 자기들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애엄마가 마닐라의 술집에서 일하다 임신한 채로 1년 전에 고향 마을로 혼자 돌아왔는데, 애엄마 자신도 애아빠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조금 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니 필리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의 생명은 한국인들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식은 남녀가 성행위를 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축복을 내려줘야만 탄생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애 아빠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애 엄마는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생명을 잉태한 것이다.

자식은 하느님이 애 엄마에게 준 축복이자 선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다 하더라도 신이 내려준 축복이자 선물인 자식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항상 되어있고 남편과 별거 시에도 자식과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남편(아버지)도 마음에 큰 부담 없이 아내와 자식의 곁을 떠난다. 자식은 하느님이 남편보다는 아내에게 준 선물인 것이다. 서민 여성들의 자식에 대한 상대적으로 강한 책임의식이 사회생활에서도 투영되어, 서민 남성들보다 책임 의식이 요구되는 중요한 직책(역할)을 부여 받고 남성들보다 상위직에 임명 받아 남성들을 관리하고 있는 듯하다.

둘째, 식민지 시절 때부터 지배층의 본처나 젊은 딸들 또는 첩들 아래에서 수많은 서민 남자들이 일해 온 역사와 전통이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연하의 여성들이 연상의 남성들보다 지위가 높은 상태에서 지시하고 감독하는 현상들이 필리핀에서는 아주 흔하고 자연스럽다. 어떤 이는 여성이 가진 본능으로서의 장점을 그 이유로 들기도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스트레스를 강하게 주면 난폭하게 굴다가 빨리 지쳐버리는 것은 수컷이고, 지그시 버티어 내는 것은 암컷이듯이, 여성들의 강한 인내심이 식민지 통치자들과 지배층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관리자 역할을 맡은 것이라고도 한다.

현재 필리핀의 관공서와 기업체에는 고위직 또는 중간 관리직 여성들이 30% 이상이나 되며, 여성 CEO들과 여성 정치인들(상원의원, 하원의원, 도지사, 시장 등)도 20% 가까이 된다. 지난 20년 간 벌써 두명의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가 필리핀이다. 지배층에서는 아직도 남성의 역할과 지위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서민층에서는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우위인 것은 아마도 서민층 남성들의 힘을 거세하기 위한 지배층의 치밀한 의도일 수도 있다. (철저한 모계 사회로 유명한 티베트의 모쒸족도 귀족들은 항상 부계 중심이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계급 사이의 지배. 피지배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수백 년 동안 관리자의 역할을 여성들에게 보다 많이 부여함으로써 서민 남성들은 서민 여성들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가지게끔 만들어 놓았다. 같은 나이, 같은 대학을 나온 남성 열 명과 여성 열 명을 함께 경쟁시키면, 여성들이 우세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처음부터 여성과의 경쟁을 아예 포기해버리는 남성들도 흔히 보게 된다. 필리핀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것 같다.

필리핀의 서민층 여성들은 어린애들을 무척 좋아한다. 쇼핑몰에서 애들이 뛰어 놀다가 진열품들을 흩트려 놓아도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고 웃으면서 다시 정리해 놓는다. 오히려 웃으면서 애들과 놀아주기도 한다. 한국의 노부모가 한두 살짜리 애를 볼 때엔 하루 종일 울더니, 필리핀 가정부가 돌볼 때엔 울지 않고 잘 지내더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노부모의 애 보는 방법은 애가 위험한 물건을 만지지나 않나, 기저귀를 바꿔줄 때가 되지나 않았나 등을 살피면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필리핀 가정부의 애 보는 방법은,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애가 잠들 때까지 계속 곁에서 눈 맞춰 주면서 얘기하고 함께 놀아 주는 것이다. 애들을 본능적으로 좋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나 필리핀의 중산층과 지배층 여성들은 대체로 한국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 만큼만 어린 애들을 좋아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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