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선거로 공인된 ‘부정부패 대물림’
필리핀 중간총선이 5월13일 치뤄졌다. 당선자 면면을 보면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정치인이 적지 않다.
재임 중 석연치 않은 이유로?쫓겨났던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마닐라 시장에 당선됐고, 이멜다 마르코스 전 영부인과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딸(마르코스의 외아들은 현재 상원의원), 글로리아 아로요 전 대통령, 현 부통령의 아들과 딸 등?유력 정치인 가족들이 대를 이어 정계에 진입하게 됐다.
필리핀에선 선거철마다 많은 사람들이 총기나 폭발물 등으로 암살 또는 살해 당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다. 이번 3달간의 선거기간 중에는 사망자 51명, 부상자 65명으로 예전보다 사고가 줄어 들었다고 경찰청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과거 선거기간 중에 발생한 사상자 수는 2010년 총선때 사망 54명, 부상 74명이었고, 2007년에는 사망 56명, 부상 69명으로 발표됐다.
‘정경일치’ 사회라 불리는 필리핀에서는 권력을 통해 거부가 되었거나 재물의 힘으로 권력을 잡은 지배층들이 온갖 불법을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다. 투표권 매매행위, 투표함 바꿔치기, 경쟁자 청부살인 등이 수시로 일어나는 데 대해 지식인들은 비판하지만, 전 국민의 90%인 서민들이 스스로 깨우치지 않는 한 이런 정치·선거 관행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왜 이런 암담한 정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필리핀 사람들과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등 외국인들은 필리핀이 바뀌려면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들 입을 모은다. 지도자를 기다리는 마음은 지도자에게 의지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지배층의 하수인이 된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서민들이 스스로 지도자가 될 가능성과 자격이 없다고 세뇌해왔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필리핀을 바꾸려는 아무런 노력과 시도도 하지 않는다. 나타날 가망이 거의 없어 보이는 영웅적인 지도자를 수십년, 수백년 동안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꼴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필리핀을 바꾸는 게 아니라 깨우친 서민들이 뭉치면 힘이 되고, 그 힘이 필리핀을 바꿀 수 있다는 진실을 언론과 학교, 종교단체들은 결코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열등한 서민들과는 다른 고귀한 피가 실재하며 유력한 집안 사람들은 고귀한 피를 소유한 존재임을 은밀하게 선전하고 세뇌시킨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세력을 키워 유력한 집안 부류에 속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수월하게 권력을 세습할 수 있게 된다. 어느 집안 또는 어느 유명한 부모의 자녀라고 점 자체가 값을 매길 수 없는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 된다. (Name recall is a priceless political asset.)
부정부패의 장본인과 그 자손들이 손쉽게 당선될 수 있는 것이 오늘날 필리핀의 현실이며, 이번 선거도 전혀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와 비리 전시장’이란 혹평 속에 일부 유력 정치가문이 판세를 독식하는 것이 필리핀 정치의 현주소다. 그 집안 또는 부모가 강도짓을 했든, 부정부패를 저질렀든, 독재정치로 인권을 유린하고 거액을 모았든, 언론 공작의 결과든, 국가의 주인인 90%의 서민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채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도자를 탓하는 한인들도 필리핀 서민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과 무의식적으로 한패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