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서민들아, 너희 운명은 타고난 것이다”
어느 날, 굉장한 부잣집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 보여주려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시골로 갔다. 둘이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 농장에서 2~3일을 보냈다.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
“어때, 재미있었냐?”
“아주 좋았어요, 아빠!”
“그래,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알았어?”
“예, 아빠!”
아버지가 묻기를,
“그래, 무엇을 배웠느냐?”,
아들이 대답하기를….
“우린 개가 한 마리뿐인데, 그 사람들은 네 마리더라고요. 우린 수영장이 마당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끝없는 개울이 쫙 놓여 있더라고요. 우리 정원에는 수입전등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밤에 별이 총총히 빛을 내더라고요. 우리 패티오는 앞마당에만 있는데 그 사람들은 지평선처럼 끝이 없더라고요. 우리는 작은 땅 안에서 사는데 그 사람들은 들이 끝이 없더라고요. 우린 하인이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 사람들은 남을 도와주더라고요. 우린 음식을 사 먹는데 그 사람들은 직접 길러 먹더라고요. 우리 집은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친구들에게 둘러 싸여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빠, 고마워요.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게 해주어서.”
관점에 따라 가난의 의미가 달라지고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다. 아버지는 물질적인 풍요와 가난에 대한 느낌을 물어봤는데 아들은 정신적인 풍요와 가난에 대해 얘기하며 동문서답하고 있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지배계층(대지주 가문, 정치 가문, 고위 성직자)들은 풍요로운 물질이 주는 안락함, 편리함과 이득을 가난한 서민들이 부러워하지 말고 질투하지 말도록 교화한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 위대하다며, 부자 아버지가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아들에게 크게 감동하였음을 강조한다. 그러면 착하고 우매한 서민들은 정말로 자기들의 삶이 부자들의 삶보다 풍요롭고 위대한 줄로 생각하며 정신적 해방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서민들에게 불평등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고 상상(정신)속에서 삶을 즐기라고, 그것이 훨씬 고귀한 삶이라고 선전한다. 빈부를 비롯한 기존질서는 신의 뜻에 의해 이미 정착되어 있는 질서이니 순응하여 안정과 만족, 행복을 찾으라고 꾸준히 교화한다.
서민층에 ‘혁명보다 타협’토록 교묘히 세뇌교육
필리핀의 역사 속에서 비교되는 것이 영웅에 대한 교육이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이 한창 무르익을 1890년 완전한 독립보다는 자치권의 확대와 스페인 국민들과의 동등한 지위 보장을 주장하며 식민정부와 대화하고 타협하고자 하였던 호세 리잘은 필리핀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당시 스페인 식민당국과 타협(협상)하려 했고, 그 후 미국 식민 당국 및 일본 식민당국과 협력했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아귀날도를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으로 인정하여 교육하고 있다. 그 두 사람(중·상류층 출신)과 동시대에 살면서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식민정부에 적극적으로 무력 대항하였던 보니파시오(서민층 출신)는 아귀날도보다 먼저 대통령에 추대되어 취임했으나 인정하지 않고, 필리핀 독립에 기여한 공로도 호세 리잘보다 더 낮게 평가하여 교육하고 있다.
서민들에게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경우 무력 대응보다는, (지배층이 선호하는)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해결할 것과 서민층이 중·상류층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교묘하게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 년 전에 한국의 일부 친일파 지식인들이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을 테러분자로, 임시정부를 테러단체로 규정하려 시도했듯이, 필리핀의 일부 지배층들도 보니파시오와 그가 조직했던 Katipunan을 테러분자 및 테러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할 지 모른다.
인류 역사상 서민들의 무력투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배층이 자발적으로 부와 권력을 합리적으로 나누어준 적은 없었다. 언제나 투쟁과 혁명을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 계층의 물갈이가 이루어졌고, 세월이 흘러 새로운 계층에게 다시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 물갈이가 시도되었다.
이러한 세대를 거치는 혁명과 물갈이 과정을 통해 사회가 차츰 정화되어가고 발전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필리핀 사회는 지난 수백 년간 진정한 혁명과 물갈이 과정을 경험하지 못했다. 혁명(革命)이라함은, 기존 사회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이제까지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던 지배계층을 대신하여, 피지배계층이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법의 대부분은 지배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짜여진 것들이므로)으로 탈취하는 권력교체의 형식이어야 한다. EDSA 시민혁명의 경우, 두 번 다 불법적으로 권력을 교체했기에 혁명의 요소는 갖췄지만, 피지배 계층의 삶과 사회적 지위가 전혀 변함이 없는 상태로 기존의 지배계층들 사이에서만 권력교체가 이루어졌으므로, 즉 권력의 주체는 변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다. 피지배 계층들은 지배계층들 사이의 권력투쟁에 들러리로 동원되고 이용되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서민(피지배 계층)들에게 ‘혁명’을 이뤄냈다며 자긍심과 만족감을 심어줌으로써, 그것 이상의 변화(진정한 혁명)를 기대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효율적인 교화(세뇌 교육)인 셈이다.
진정한 혁명이 어려운 이유는, 혁명으로 손해를 보는 지배계층은 혁명을 하면 손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에 격렬히 반대하는 반면, 혁명으로 이익을 볼 예정인 피지배계층(서민)은 혁명이 뭐가 어떻게 이로운지 몰라서 기회가 오더라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지배 계층을 세뇌시키고 우민화시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권위가 높을수록 권위가 낮은 대상을 속이거나 기만하는 게 수월하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도 하나의 권위인데 재벌 방송국이나 재벌회사들을 이용하여 유치하고 현란한 오락, 연예, 스포츠 그리고 자극적인 (섹스와 폭력)영화들이 끊임없이 서민들의 뇌 속을 흐르게 하여, 인생과 사회문제를 심사숙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다.
수년 전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시기에 잠시 한국 출장을 갔던 차에 한두 편 시청한 적이 있었다. 장금이라는 주인공이 음식 솜씨를 경쟁자와 겨루는 장면이 나왔는데, 최고의 요리사임을 평가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왕’이어서 흠칫 놀랐었다. 당시 왕이 음식 맛을 구별하고 심사하는 전문가가 분명 아니었을 것이므로, 결국 ‘왕의 입맛’과 ‘비위’를 가장 잘 맞추는 사람이 궁중 최고의 요리사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제 3자나 전문가로부터 최고의 요리사라고 인정받을 실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왕의 입맛을 맞추지 못하면 최고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객관적인 실력보다는 상사나 윗사람의 비위맞추는 것이 출세와 성공의 첫째 조건임을 은연중에 그리고 교묘하게 암시하는 대목이어서 씁쓸했었다.
필리핀 언론은 모두 재벌(지배층) 소유
매스컴을 이용하여 지배층이 원하는 방향으로 서민들을 교화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보면 될 것이다. 언론을 효과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면 필리핀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인지, 필리핀의 언론은 모두 재벌(지배층)들이 소유(지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