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장군들⑤김백일]흥남철수때 북한동포 10만명 구출···1951년 3월 비행기사고 순직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김백일 장군은 흥남 철수시 북한 동포 10만명을 구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막상 전장(戰將)으로의 김백일은 민간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육군보병학교의 백일사격장의 유래를 아는 장교도 많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은 1950년 7월 김홍일의 뒤를 이어 1군단장에 기용되었다. 서울수복 후 북진이 시작되자 1군단은 10월1일 38선을 처음으로 돌파하였다. 이것이 국군의 날의 기원이다. 10월10일 원산을 탈환한 수도사단은 10월31일에는 문천, 11월25일 청진, 11월30일 부령으로 진출하여 최종목표인 회령-웅기를 향해 진격하였다.
함북 북청 출신의 이병형 장군의 명저 <대대장>은 이때 고향으로 귀환하는 장병의 감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10월7일 원산 상륙을 위해 작전을 개시한 미 제10군단은 원산항 기뢰제거를 위한 소해작업 때문에 뒤늦게 10월26일에야 원산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원산은 이미 10월10일 국군에 의해 탈환돼 미 10군단은 유병(遊兵)이 되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 후 10군단을 8군의 지휘 하에 넣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또 한번의 상륙전으로 극적 반전을 이루려던 맥아더의 결정적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더 큰 불행이 닥쳐왔다. 3사단이 장진호를 향해 진격 중 10월25일 수동 부근에서 예기치 못한 적의 저항에 부딪쳤다. 중공군 8군이었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김백일은 유엔군이 후퇴하자 흥남을 거쳐 철수하던 중 피난민 10만을 안고 나왔다. 이것이 영화 <국제시장>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김백일 장군은 특히 전술능력이 뛰어났다. 창군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는 대체로 일본군 출신보다 만주군 출신이 전술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았는데,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을 상대로 옥쇄작전을 벌이던 일본군에 비해 만주군은 공산당을 토벌하면서 대유격전 실전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백일이 미 육군보병학교에 유학을 가려하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귀관은 포트 베닝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김백일은 백선엽과 함께 특히 공비 토벌에 공이 컸다. 전선 후방에서 준동하던 좌익들이 섬멸적 타격을 받은 것은 이들의 분전에 의해서다. 김백일의 동상이 흥남 철수시 민간인 구출을 기려서 거제도에 세워졌지만, 좌익들이 김백일에 극악한 행패를 부리는 것은 공비토벌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박혔기 때문이다.
백선엽의 만주군 경력을 트집 잡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빨갱이들은 낙동강 교두보 확보 및 평양 선두 입성에서의 백선엽 못지않게 지리산 공비 토벌을 마무리한 데 대해 이를 간다.
김백일의 본명은 찬규이다. 김백일은 정일권, 백선엽과 함께 봉천군관학교 출신이다. 그들은 북한이 소련군 점령하에 들어가자 바로 월남하여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金白一은 백선엽에서 白, 정일권에서 一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전우애는 이만큼 각별하였다. 만주군에서 공산당을 상대해왔던 그들은 투철한 반공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김백일은 1951년 3월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였다.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다가 신임 릿지웨이 8군사령관의 단호한 지휘로 지평리 전투 등 반공을 시작하던 시기였으므로 그 손실은 컸다. 만주군 출신의 김백일 장군은 뛰어난 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