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후 장군①이재전] 율곡사업 ‘핵심’ 자주국방 토대 다져···차지철 밑에 둔 건 박정희 ‘오점’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재전은 1968년 1.21사태 당시 1군사 참모장이었다. 김신조의 충격으로 전선에 철조망이 쳐지고 1953년 휴전 이래 전선이 말로만 ‘철통같던’ 전방 방어태세가 실질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군사분계선처럼 엉성한 유자 철조망에 불과했고, 장벽이 아니었다. 철조망은 오키나와의 미 해병사단 주둔지 둘레에 쳐져 있던 것을 가져왔는데,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업이었다. 이재전 참모장은 이를 철저히 챙겨나갔다. 155마일 전선을 구석구석 꿰뚫고 있는 최고의 전술가이었기 때문이다.
이재전은 7사단장을 거쳐 한미1군단 부군단장이 되었다. ROK US I corp(group)은 한미연합사가 생기기 이전 한국군과 미군의 협조를 위한 작전사령부의 원형이었다. 한미I군단은 1군단, 5군단, 6군단과 함께 미2사단을 지휘하는 집단군 수준이었다. 여기서 길러진 인재들이 1978년 연합사 창설의 주역이 된다.
합참 전략기획국장으로서 이재전은 전력증강계획(율곡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율곡계획은 한신 합참의장-이병형 본부장-이재전 전략기획국장-임동원 전략기획과장 체계로 추진되었다. 중심은 이병형 장군이었다. 임동원은 ‘율곡’이라는 코드 네임과 방위세 2% 부과 등의 아이디어를 냈다. 이를 이끌고 나간 것은 미군 철수의 비상상황에서 자주국방노력을 가속화한 박정희였다. 그는 중화학공업 건설과 방위사업 육성을 연결시키는 국가경영전략을 발전시켰다.
10.26 당시 이재전은 차지철 밑의 경호실 차장이었다. 군단장, 합참본부장을 마친 이재전을 이런 자리에 앉힌 박정희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합수부는 이재전이 10.26의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정승화 참모총장은 이재전을 예편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박정희의 지혜롭지 못한 인사로 군은 귀한 재목을 잃었다. 한신-이병형-이재전의 군맥은 6.25전쟁 이후 군의 최고의 자산이었다. 이를 끝까지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은 박정희의 최대의 실책이었다.
노태우 정부에서 이재전은 이병형의 뒤를 이어 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았다. 전쟁기념관장 외에도 이재전은 ‘한자 배우기’ 전파에 앞장섰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과오 중에서 특히 유감스러운 것이 국문전용정책이다. 한글을 전용하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한자를 자연스럽게 해독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한자로 문자생활을 해왔다. 요새 ‘젊은이’는 1960년대 사상과 지성의 보고인 <사상계>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야 고전번역원에서 번역을 한다고 하지만, 1960년대의 신문 잡지들을 일일이 번역에 의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젊은 세대가 한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것은 컴퓨터를 하지 못하는 70대와 다를 바 없다. 사범학교 출신인 이재전은 이를 우려하여 한자배우기를 전개하였다.
이재전은 지금도 대전현충원에 이병형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요즈음 방산비리는 이들에게 참으로 죄송스러움을 후배들은 통절히 각성하여야 한다. 국가 지도력은 투철한 철학과 의지력을 갖춘 대통령부터 나온다. 이를 구현하는 것은 각 부문-안보, 경제, 사회, 문화의 전략가이다.
이재전 장군은 국군에 드문 명철한 전략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