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후 장군④장도영] 용문산전투 용장, 5.16 박정희 지지 불구 김종필한테 밀려 ‘미국행’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장도영은 용문산 전투의 용장이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70만명을 전개하고 춘계공세를 감행하였다. 3군단이 현리에서 와해되었다. 1951년 5월 용문산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밴 플리트 탄약량’으로 대표되는 화력전투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전투의 마지막 결판은 보병에 의해 결정된다. 장도영은 홍천강과 용문산 일대에서 전면방어진지를 편성, 중공군 63군 예하의 2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도주하는 중공군을 쫓아 절반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용문산 전투의 승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리던 유엔군이 숨을 돌리게 되고 국군은 3군단 현리전투의 수치를 씻은 일대 전기가 되었다.
1951년 춘계공세에서 중공군의 피해는 투입병력의 3분의 1 즉 9만명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피해는 중공군의 공격 일변도의 전략에 제동을 걸었다. 반격을 개시한 유엔군은 5월 말 고랑포~연천~화천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리지웨이가 벼랑끝 전국을 안정시켰다면, 밴 플리튼는 공세전환의 계기를 만들었다. 공산측은 휴전협상으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보려 6월 23일 소련 유엔대표 말리크가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서방측은 이 제의를 공산측이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야욕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6월30일 수락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휴전협상 동안에 진지를 강화하면서 담담타타(談談打打) 회담전술로 나와 전쟁은 1차대전 중 참호전과 같이 막대한 출혈을 내며 2년 이상을 끌었다.
장도영은 평북 출생으로 일본 동양대 재학 중 학병에 나갔다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임관하였다. 장도영은 2공화국에서 최영희, 최경록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었다. 창군 초기 김석원, 김홍일 등의 원로를 제외하고 6.25전쟁에 활약한 김종오, 한신, 장도영, 최영희 등은 모두 학병 출신의 30대 청년장군들이었다. 이들이 6.25의 주역이었다. 이들은 주로 이북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같이 월남하여 군에 들어온 순서대로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을 같이 하였고 전투에서 피를 나눈 연대가 진했다.
장도영은 6.25가 터질 때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파면된 박정희를 문관으로 채용하고 김종필 등 8기생들을 데리고 정보국을 이끌었던 것이 장도영이었다. 채병덕이 이들이 올린 정보보고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이 국군이 남침을 당한 치명적 실수였다. 5.16이 나기까지, 그리고 쿠데타가 나서 그가 취한 애매한 행보는 이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16이 혁명으로 성공하는 결정적 계기는 장도영 참모총장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수락하였기 때문이었다. 국가위기 시에 군의 지휘계통이 살아있다는 것은 결정적이다. 이 점에서 군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킨 12.12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같은 평안도 출신, 가톨릭으로서 장도영 참모총장을 믿었던 장면 총리가 격노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5.16이 난 50여일 후 7월2일 김종필은 박정희에 보고하지 않고 장도영을 기습 제거하였다. 선참후보(先斬後報)였다. 장도영은 어차피 혁명이란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했다. 그는 미국으로 보내졌고 정치학박사를 취득한 후 미시간 대학교수로 있다가 타계하였다.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에 여한이 없다는 것을 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용문산 전투의 용장 장도영이 5.16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