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장군들⑫장창국] 창군 핵심으로 작전국장 거쳐 육사교장으로 인재양성 큰몫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장창국은 경기중을 나와 의사가 되라는 부친의 권유를 마다하고 일본 육사 59기로 입교하였다. 대동아전쟁 말엽에는 1930년대의 이종찬과 같은 구왕실 자제 말고도 상당수 민간 명문의 자제들이 육사에 지원하였는데 장창국이 그런 경우다.

광주 서중을 나온 58기의 정래혁도 마찬가지다. 해방 후 장창국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창군의 핵심이 되었다. 남조선경비사관학교의 생도대장을 맡았고, 경비대 작전교육국장, 통위부 작전처장을 맡았다. 미국 유학 후에 김홍일 밑에서 참모학교의 부교장으로 일했다. 경기중, 일본 육사를 나왔다는 것이 그가 주로 작전 교육 분야에 발탁된 배경이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장창국은 작전국장이었다. 정보국장은 장도영이었다. 5.16때에는 장도영 참모총장 밑의 참모차장이었다. 장창국은 휴전 후 2군단장, 1군단장, 육사교장을 거치고, 5.16 후에는 2군사령관, 1군사령관을 거쳐 합참의장까지 오르는 등 군의 고위직을 순탄히 올랐다.

이승만 정부에서 백선엽, 정일권 등의 이북출신이 군인맥의 중심이었다고 하면, 박정희 시대에는 김종오, 김용배, 장창국 등의 경기·충청출신이, 다음에는 서종철, 노재현, 정승화 등의 영남출신이 주류가 되었다. 군의 영남색은 3선개헌, 10월유신 등에 따라 강화되는데 그 극단이 윤필용과 전두환 등의 하나회다.

박정희가 유독 일본 육사출신을 중용한 것도 있지만 장창국은 박정희 정권이 제 정신일 때 거의 마지막으로 요직에 발탁된 케이스다.

전공(戰功)과 지휘관이 중심이 되는 군에서 주로 작전·교육분야의 참모로서 활약한 장창국은 장도영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역할과 기여는 이 분야에 근무했던 제한된 사람이 안다. 육군사관학교가 진해에서 화랑대로 이전한 후 1955년 12대 육사교장으로 부임한 장창국 교장 때 사관학교설치법이 공포되어 졸업생은 이학사의 학위를 받게 되었다. 장창국은 이학사의 자격을 줄 수 있도록 학제를 정비하였다. 이를 위해 장창국은 이기백 등 후에 학계의 거목이 되는 일류교수를 모아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기 위해 진력하였다.

서울고등학교 김원규 교장은 육사를 돌아보고 “대한민국에서 대학다운 대학은 육사 하나뿐이다”라고 극찬하고 졸업생에 육사 진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956년 16기가 입교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 ’불굴의 육사혼의 표상‘ 강재구 등이 이들이다.

장창국 교장의 지도로 사관생도의 신조, 즉 “하나.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하나. 우리는 언제나 명예 속에 산다. 하나.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가 제정되는 등 육군사관학교의 정신적인 골격이 이룩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훈으로 지·인·용(智·仁·勇) 휘호를 내렸다. 1955년 10월 이승만 대통령 임석 하에 11기생이 졸업하였다. 이후 사관학교 졸업때 대통령이 임석하여 졸업생 하나하나와 악수하고 격려하는 것은 전통이 되었다.

장창국은 제대로 된 Military Academy로서 육사를 창조하였다. 장창국 장군은 군인은 전공에 못지않게 군인을 길러내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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