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장군들⑪장지량] 해인사 팔만대장경 구해···예편 후 외교관으로 맹활약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해인사는 승보사찰 송광사, 불보사찰 통도사와 함께 3보 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이다.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휩쓸던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가 불법의 힘으로 침략을 물리치고자 만들어낸 불심의 정화(精華)요 결실이다. 유럽이나 중국, 인도의 사원들이 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신앙이 아니고서는 될 일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에 의하여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보고요, 인류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일시에 사라질 번한 때가 있었다. 1951년 8월 유엔군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면서 당시 해인사로 숨어든 북한군을 폭격으로 제압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때 이를 막은 것이 당시 1전투비행단 작전참모 장지량 장군이다. 그는 “어떠한 엄벌을 받더라도 1400년 된 문화재를 한 줌의 재로 만들 수 없다”며 미군측을 설득하면서 출격을 거부했다. 그의 충정에 감동을 받은 미군의 결정으로 공격이 취소돼 팔만대장경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식 기록에는 김영환 편대장이 명령을 받았는데도 이를 거부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군인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좀 어렵다. 혹시 장지량 장군이 김영환 장군의 형인 김정렬 장군의 체면과 이미 고인이 된 김영환의 영예를 존중하여 그에 영예를 돌린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구한 것이 우리 공군인 것은 틀림없다.
전쟁 중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참전국 간에 다를 수 있다.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이 독일의 하노바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영국 왕실이 본래 하노바에서 왔기 때문이다. 만약 하노바가 미 공군의 작전지역이었다면 그러한 배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고도인 교토는 폭격하지 않았다. 공군 수뇌부에 교토가 일본 역사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아는 장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이 보존된 연유도 이와 같다.
장지량 장군은 8만대장경의 의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어려운 결심을 관철하였던 것이 아닐까? 장지량은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뒤 김정렬, 김신 등과 함께 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육군 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되자 작전국장으로 F-51 무스탕 전투기 도입과 10개 비행장 확보 계획을 수립해 공군의 초석을 다졌다. 그 후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제9대 공군참모총장(1966~1968)으로 재직하면서 F-4팬텀기 도입 등 공군의 현대화를 주도하고 10개 전투비행단 기지를 확정하였다.
고속도로에 비상활주로를 설치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일본 육사 57기인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나온 장지량의 기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잘 활용한 것이다.
장지량은 예편 후 외교관으로서 주 에티오피아, 필리핀, 덴마크 대사를 역임하였는데 셀라시아 에티오피아 황제를 설득하여 1972년 유엔총회 한국문제 표결에서 기권에서 지지로 바꾸어놓은 것은 당시로서는 큰 외교적 업적이었다. <매일경제>(매경) 회장 장대환은 그의 영식이다.
장지량 장군은 공군을 실질적으로 만든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