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장군들⑨이종찬] 친일파 후손이나 군 정치중립 지킨 ‘참군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종찬은 한일합방에서의 역할로 자작을 받은 이하영의 손자로 태어나 일본 육사 49기로 임관, 공병 소좌로 해방을 맞았다. 동기생으로 채병덕이 있다. 이응준, 김석원 등의 대좌들은 대한제국 군대에 들어 왔다가 한일합방 후에 일본군에 편입된 경우이고,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육사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구 왕실 등에 극히 제한되었다. 이종찬은 대표적 친일파의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나,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작위도 세습하지 않은 깊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종찬은 김석원 등 원로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바로 들어오지 않고 근신하다가 늦게 군에 들어 왔다. 국방부 장관 이범석은 이종찬의 인품과 경력을 높이 사서 국방부 차관이나 참모총장으로 발탁하려 했으나 고사하고 있다가, 1949년 국방부 제1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이종찬이 백선엽과 같이 박정희를 구제한 것도 이때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종찬은 김석원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 3사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51년 이종찬은 정일권 후임으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려 무리수를 쓰는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대통령중심제이면서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하는 제헌헌법이 초래한 문제이기는 하였으나, 이승만의 독재성향을 보여준 헌정의 일대비극이었다.

이승만은 이종찬에게 병력 출동을 명했으나 이종찬은 이를 거부하였다.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휘권 하에 있는 국군을 함부로 빼낼 수도 없었거니와, 편법으로 계엄령에 필요한 병력이라고 구실을 댈 수도 있었지만, 이종찬은 대통령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고 군의 정치개입을 금하는 훈령217호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이종찬을 해임하였다. 이종찬은 참모총장을 백선엽에 물려주고 육군대학으로 가게 된다. 참모총장을 했던 장군이 교장으로 내려왔으니 교장이라 부르기도 어색하여 총장라고 불렀는데, 이래로 육대 교장은 육대 총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박정희는 군의 대부로서 이종찬을 흠모했다. 대체로 만주군 출신은 일본육사 출신을 위로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부산 정치파동에서의 당당한 처신으로 군내의 이종찬의 권위는 높았다. 박정희는 이종찬의 권위를 이용해, 4.19이전 혁명의 지도자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이종찬은 거절했다.

이종찬은 군의 정치개입 반대에 대한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30년대의 일본군이 2.26사건 등으로 정치에 개입하였다가 결국 패망으로 치달은 역사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종찬은 4.19혁명으로 수립된 허정 과도내각에서 국방부장관을 맞는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종찬을 추천하였지만 장면 총리는 군을 모르는 현석호를 썼다가 5.16을 만나 헌정의 파탄을 초래한다. 박정희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이종찬을 모시지만, 이종찬은 국회에 한번도 출석하지 않았다.

군의 정치적 중립의 표상으로 되어 있는 이종찬을 제2의 쿠데타인 10월유신의 치장(治裝)으로 모시려 했다는 것은 당시 박정희의 총명이 얼마나 흐려져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신이 ‘면도날’같은 참 군인이었다면 이종찬은 ‘난초’와 같은 참 군인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를 흠모하는 군인, 언론인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종찬 장군은 군의 ‘정치적 중립’의 원칙을 정립한 ‘참 군인’이었다.

군의 정치 개입을 거부한 참 군인으로서 이종찬은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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