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장군들⑥백선엽] 다부동전투 영웅···1953년 한미방위조약 구상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스파르타의 3백 용사가 테르모필레의 협곡에서 페르샤의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한 기록은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다. 1950년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낸 1사단의 다부동 전투는 한국의 테르모필레였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된다. 8월15일 다부동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30세의 청년장군이었던 사단장 백선엽은 부하들에게 “내가 등을 돌리면 나를 쏘라”는 비장의 투혼으로 사단의 선두에 섰다. 8월16일 왜관 북서쪽 낙동강변에 B-29 99대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 가해졌다. 다부동전투는 8월30일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백선엽은 북한군 8월공세의 예봉을 꺾었다. 이로써 백선엽의 1사단은 김종오의 6사단과 함께 국군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북진에서는 평양 입성의 선두에 서게 된다. 평양의 지리에 익숙한 백선엽은 1950년 10월 대동강을 선두로 도하하여 평양에 입성한다.
1920년생 백선엽은 평양사범 출신이었다. 백선엽은 이후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간다. 정일권은 4기, 백선엽은 9기였다. 박정희는 봉천군관학교의 후신인 신경군관학교 2기였다. 이들은 모두 각 기수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이를 빌미로 민족문제연구소는 백선엽 등을 친일군인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他山之石으로 삼을 일이 있다. 제정 러시아의 기병 중장이던 만넬하임은 그 군사경력을 활용하여 러시아에서 핀란드가 독립하는 전쟁을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만넬하임은 1939년 스탈린이 침공해오자 지형과 스키를 이용한 절묘한 기동전으로 소련군을 구축한다. 스탈린은 톡톡히 망신을 당하게 되고 이것이 히틀러가 소련군을 얕보고 소련을 침공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된다. 만넬하임은 후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중국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사경력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승만 대통령 당시 대장은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세 명뿐이었다. 그중에서 전공은 백선엽이 으뜸이었다. 릿지웨이, 밴플리트 등 미군장성도 백선엽을 가장 신임하였다. 이들 2차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노장들에게 백선엽은 아들 같았으나, 백선엽은 무엇이든지 가르치면 잘 받아들이고 성과를 거두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데는 이승만의 공이 절대적이지만, 미 군부와의 친분을 활용하여 미 군부에 처음 이 구상을 제기한 것은 백선엽이었다.
백선엽은 이종찬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된 이래 정일권과 번갈아가며 참모총장과 1군사령관을 역임, 대장을 7년 반이나 달았다. 그만큼 백선엽은 군인으로서 전공도 대단하였지만 영예도 누렸다. 그중에서 백선엽이 숙군과정에서 절체절명의 박정희를 살리는데 도움을 준 일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이다.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 숙정시 백선엽은 정보국장으로서 실무 책임자였다.
후일의 특무대도 당시에는 백선엽의 휘하에 있었다. 박정희는 만군 후배 백선엽에 구명을 탄원하였고, 백선엽은 박정희의 선처를 상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백선엽은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게 하였는데, 6.25가 발발하자 박정희는 군에 복귀한다.
백선엽은 지금도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자유로 구사하여 미국의 참모대학, 일본의 방위대학교에서 강의한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부임하자마 백선엽 장군을 찾아뵙고 인사하는 것이 관례다. 그들이 傳說처럼 받드는 맥아더, 릿지웨이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백선엽은 그들에게는 神話다. 백선엽 장군을 명예 원수로 헌양(獻揚)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