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장군들⑩한신] 일본학도병 출신 최고의 연대장···’장병 제1주의’ 지침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신은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대를 나와 일본군에 징집되어 남방에서 전투한 학도병출신이다. 박정희와 같이 육사 2기생으로 임관한 한신은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 1950년 7월 김석원 사단장 예하에서 안강·기계 방어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1951년 5월 대관령 전투에서는 중공군과의 고지 점령에서 간발의 차로 고지를 선점하여 3군단의 치욕의 현리전투 이후 밀리던 동부전선을 안정시켰다. 1953년 6월 화천 전투에서는 정일권 군단장의 명령을 받고 5사단 부사단장으로 화천댐을 사수해 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현지에 나와 직접 무전기로 독전하던 전투였다. 6.25전쟁 중 한신은 가장 전투를 잘한 연대장으로 꼽힌다.
5.16후 감사원장으로 잠시 혁명정부에 참여하던 한신은 곧 군에 복귀, 참군인의 길을 걷는다. 주월남군사령부가 귀국하여 제3야전군사령부가 되기까지 제1야전군이 전방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때의 제1야전군사령관이었다.
그의 최종직책은 합참의장이었는데, 818이전의 합참의장은 지금과 달라 일종의 한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신을 참모총장을 시키지 않고 이세호를 시키는 것을 보고 모두들 군의 앞날을 걱정하였는데, 그 우려는 10.26으로 터졌다.
한신의 지휘철학은 장병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운다는 장병 제1주의였다. 수도사단에서 2등병으로 군복무를 시작한 한신은 사병의 고충을 잘 알았다. 당시 병사들은 배를 채우는 것이 소원인 상황이었다. 장병들로서는 취사병이 선호 보직이었다. 장교들의 봉급은 가족의 끼니를 겨우 차릴 수 있을 정도여서 장교들의 부패는 문자 그대로 ‘생계형 부패’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군이 부패고리로 연결되었다.
한신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단호한 숙정에 나섰다. 한신은 헬기를 타고 가다가 아무 부대라도 불시 내려앉아 1종을 검열하여 부족량이 발견되면 바로 지휘관을 체포하여 압송하는 초강경 방법을 썼다. 1960년대 군의 부패는 이런 방법으로 잡혀간 것이다.
월남참전이 시작되자 장병들의 생활도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월남전은 국가경제에도 큰 뒤받침이 되었지만 군인들도 활로를 틔우는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정군과정에서 한신은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는 신조로 길러진 육사출신에 기대를 걸고 이들을 ‘사단장의 분신’으로 활용, 사단장의 지휘력을 물샐 틈 없이 침투시켰다. 휴전 후 흐트러진 교육훈련을 바로잡는데 이들 원칙대로 배운 정규육사 출신들은 교범이 되었다. 한신은 육사 출신 가운데 장재(將材)를 특별히 선발하여 부관으로 두고 철저히 훈련시켰는데, 빈틈없는 조성태 장관도 그중 하나다. 이들 부관출신들이 후일 <참군인 한신 장군>을 출간한다. 조성태 부관이 “춘천호에 트럭이 빠졌는데 지금 구조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한신은 “춘천호의 깊이가 얼마냐”고 물었다. 제대로 답을 못한 부관은 얼굴이 붉어졌다.
‘면도날’ 한신은 “군인은 하나라도 철저히, 면밀히,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고 가르쳤다. 항상 전투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군인은 당연히 교육 제1주의, 장병 제1주의로 나갈 수 밖에 없다.
한신은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참 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