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후 장군⑤이한림] 육사 중흥의 기수···박정희 일본육사 동기로 정주영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주역’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한림은 1921년생으로 1917년생 박정희와 만주군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동기다. 이한림은 함경남도 안변, 박정희는 경상북도 선산이 고향인데 휴가때 일본과 조선을 같이 여행하면서 조선이 얼마나 낙후되었느냐를 뼈저리게 공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와 이한림은 군에서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박정희가 고전하고 있을 때 이한림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육사 2기인 박정희보다 먼저 임관하였고, 자유당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하였는데 장면 정부에서는 제1 야전군사령관이 되었다.

5.16이 터졌을 때 대통령 윤보선이 “올 것이 왔군” 했는데 이는 당시 사회와 군에 널리 퍼져있던 생각이었다. 5.16은 일본과 미국의 군대의 경영을 익힌 군인들이, 民草들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절규를 하듯,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한림은 윤보선의 “자중하라”는 편지를 받고 행동에 나서지 않다가 1군사령부 내의 혁명군측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권총을 달라는 장교에 “1군사령부 마크를 단 장교는 감히 나에게 이럴 수 없다”고 호통치자 그 장교가 1군사 마크를 떼고 요구하였다는 것은 이한림의 강직한 군인관을 보여주는 실화다. 이한림의 흉중에도 5.16은 필지(必至)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앞장서 나서지는 못하지만, ‘미필적 고의’(未畢的 故意)로 동조했을 것이다. 이것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수락한 장도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한림은 육사교장 시절 진시황(秦始皇)이란 별명을 들었다. 1950년대 지금 보아도 장대 웅혼한 화랑연병장을 건설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으나 사관생도의 기상을 담고 키우기에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한림은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한림은 일본 육사 진무대(振武臺)에서 교육을 받아서 사관학교의 터전에 대한 나름의 원대한 포부가 있었던 것이다. 화랑연병장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 인력과 장비는 엄청났다. 생도들도 일과 후 조경공사에 힘을 보탰다. 그러면서도 교육과정은 엄격히 지켜졌다.

미고문관들이 우리 군을 조언하던 시절에 POI(program of instruction)는 ‘명령’이었다. 이한림은 공사에 투입된 미군들에게서 자동차 엔진을 제공받아 기계공학 실습장비를 갖추기도 하였는데, 당시 국내 어느 대학도 갖추지 못한 최고 수준이었다. 이한림이 후일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건설부장관을 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이한림, 정주영은 다같이 하나의 목표로 돌진해나갔다.

이한림 교장이 교수부를 순시하였을 때의 일화다. 어느 중위가 교장이 들어와도 발을 책상 위에 턱 올려놓고 책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장이 어이가 없어 “귀관은 어느 대학을 나왔나?”고 힐문하니 힐끗 보더니 “나요? 서울사대 나왔시다” 하는 것이다. 이북 출신이었다. 이한림은 그 길로 순시를 그만두고 그 후로는 교수부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교수부는 일반부대가 아니라는 것과 젊은 교수의 패기를 존중하는 신화같은 이야기다.

이한림은 부관으로 한신 장군과 같이 육사 11기 이래의 각 기의 대표적인 인재를 골라 각별히 키웠다. 육사 출신이 초심을 잃지 않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도록 북극성 동창회의 설립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투자라는 것을 보여준 이한림이었다.

이한림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중흥의 공로자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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