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장군들⑦송요찬]1952년 전선방문 아이젠하워 놀래킨 한마디 “공격준비 완료입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송요찬 장군은 4.19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데모대가 경무대로 육박하는 가운데 급박해진 경찰이 실탄 지급을 요구해왔다. 당시 군은 M-1 소총을 주로 사용하였고 경찰은 칼빈 소총을 사용하였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에 M-1 소총 탄약을 지급도록 하였다. 물론 경찰은 이 탄약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로써 경찰 발포로 인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다.
4.19가 혁명으로 성공하는 데는 이처럼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적시적이고 엄정한 계엄군 운용이 크게 기여하였다. 4월혁명이 학생혁명이라 하나 정확히는 국민혁명이다. 이때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국민의 군대로서 국군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일찍이 군에서 ‘타이거 송’으로 알려진 송요찬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다. 그중 백미는 1952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전선의 부대를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송요찬의 보고는 딱 세마디, “Enemy is there. We are here. We are ready to attack.”였다. 상세한 브리핑을 기대했던 아이젠하워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잠시 후 아이젠하워는 “내가 받은 브리핑 가운데 가장 훌륭한 브리핑’이라고 격찬하였다. 과연 그 송요찬에 그 아이젠하워다.
1918년생인 송요찬은 당시 34세였다. 송요찬은 집안이 가난하여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다. 그는 평양사범학교 출신인 백선엽이나 게이오 출신인 김종오와는 배경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송요찬의 이 재치와 기개는 어느 명문출신 장군에 못지않다. 이들 청년장군들이 6.25전쟁에서 조국을 지켜낸 것이다. 송요찬은 6.25 발발 당시 헌병사령관으로 한국은행의 지금을 진해로 이송하는 공을 세웠고, 북진 중에는 1군단장 김백일 예하의 수도사단장으로 원산, 함흥, 청진을 회복했다. 1952년 수도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 2개 사단을 격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은 이밖에도 이병형, 임부택 등이 있는데 이들은 6.25전쟁 중 가장 전투를 잘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병형의 명저 <대대장>은 그 기록이다. “병은 소련군, 하사관은 일본군, 장교는 독일군, 장군은 미군으로 구성된 군대가 최고의 군대”라는 데서 보듯이 일본군에서 하사관은 부대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끌어가는 중추였다.
장교들은 뒤에서 지켜만 보고 하사관들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것은 오장(伍長), 군조(軍曹), 조장(曹長)의 하사관들이었다.
1959년 2월 육군참모총장이 된 송요찬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미국 군원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군원물자를 빼돌리고 장병을 후생사업으로 부려먹던 자유당 군대에 만연하던 부패도 막지 못했다. 모두 너무도 빈한하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려고 하나, 박정희가 4.19 이전에 궐기하려고 계획을 준비하였던 것은 이러한 군대를 보고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5.16에 가담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모든 것에 앞서, 송요찬이 6.25전쟁 중 수도사단장으로 올린 전공은 길이 남을 것이다. 송요찬 장군은 탁월한 전웅(戰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