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을 ‘김모군’이라 부른 이 시대 마지막 혁명가 박창암 장군을 아십니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박창암은 1921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이병형 장군이 태어난 곳도 북청이지만 물장사를 하여서라도 자녀를 공부시키는 북청인의 생활력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박창암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관동군에 있다가 귀국해 특수공작차 북행, 인민군 수뇌부에 침투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돼 수감 중 탈출해 중위로 임관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1군단 정찰대장, 8사단 수색대대장, 동해유격대장, 육군특수부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심리첩보전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수색대대라 하나 2천명의 월남 청년을 거느린 당당한 부대장이었고 사단 예비대 역할도 하였다고 당시 8사단장 최영희 장군은 증언하고 있다. 중공군에 포위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박창암의 군 경력은 특이하고 다채롭다.
박창암은 혁명가였다. 그의 글과 글씨, 언변은 가히 영웅호걸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박창암이 5.16에 참여한 목적과 명분은 국민혁명이었다. 그는 군사정부에서 혁명검찰부장이 되었다. 부정축재자 척결 등 구악을 쓸어내는 그의 기상은 서릿발 같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반혁명으로 제거된다. 어차피 닥쳐 올 혁명주체간의 권력투쟁과정이었다.
박창암은 김종필을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김모 군(金某 君)이라고 불렀다. 혁명가 박창암은 정치인 김종필과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김종필의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보면 김종필은 박정희가 하기 어려운 욕먹을 일도 저지르는 악역도 맡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공화당 창당과정에서의 의혹사건 등을 박창암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정치에서 물러난 박창암은 경기도 의정부에서 농장을 개척한다. 1968년 불의(不義), 비정(秕政), 비굴(卑屈), 오도(誤導), 비리(非理)를 참지 못하는 박창암은 야(野)에서 뛰쳐나와, <자유>를 창간한다. 이를 통해 그는 국민정신혁명의 기본인 민족사관, 국사 찾기, 민족성 복원에 대해 정론(正論)으로 비론(非論)을 잠재웠으며, 직필(直筆)을 통해 권력자들을 떨게 하였다. 그의 저작은 1000 페이지 가까운 <창암 만주 박창암장군 논설집>(蒼巖 滿洲 朴蒼巖將軍 論說集)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국한문 혼용인 이 거질은 젊은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박창암은 호가 만주(滿洲)였다. 만주는 한민족의 본향이며, 박창암에 있어 만주는 반드시 수복해야 할 구강(舊疆)이었다. 1976년 새해에 ‘새 국민상과 광복사관’이라는 주장에서 박창암은 이렇게 포효하고 있다.
“새해는 국사광복의 해! 그 신천지를 개척하는 아니 위대한 역사강역(歷史疆域)의 그 영광의 근원에서 미래의 생존 영창법칙(生存 永昌法則)을 발굴하는 민족사관(國民史觀) 부활의 해! 국민상(國民像)을 역사사관(民族史觀)으로서 혁명하는 사통중흥(史統中興)의 계기의 해여야 한다.”
박창암 장군은 이 시대 마지막 혁명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