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도 의리가 있는데···” 박정희 탄식에 김종필·정승화 대답이 궁금하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육사 생도가 혁명지지 행진에 참가해서는 안 되는 강재륜 북극성동창회장의 이유는 명백했다.
당시 육사생도대 부대장으로 생도들의 행진 참가를 압박했던 박창암 대령의 우국충정은 의심할 바 없지만, 사관생도가 이런 일에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되면 자꾸 그런 일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걱정이었다. 1961년 5.16당시 국민들의 걱정은 적화(赤化)의 위험이었다.
선량한 정치인 장면 총리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불과 8년 전 북한과 전쟁을 치른 군인들에게, “판문점으로 가자”며 외치는 학생들은 좌시할 수 없도록 위험해 보였다. 혁명공약 제1항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것은 많은 국민들의 불안을 대변했다. 백보를 양보하여 이들 국민의 불안을 바로잡기 위해 5.16 군사혁명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김종필이 선참후보(先斬後報)였다고 자랑하는 김종필의 장도영 제거는 분명히 용서할 수 없는 쿠데타였다. 어차피 장도영이 혁명을 끌고 나갈 것은 아니더라도 이런 방법으로 제거할 것은 아니었다. “혁명에도 의리가 있는데…”라는 박정희의 탄식은 이를 보여준다.
김종필은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소이부답’(笑而不答) 회고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다. 장도영이 숨을 거두며 “박정희와 김종필에 유감이 없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하였다지만, 장도영의 내밀(內密)은 김종필에게 “그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하는 가책(苛責)을 심어주고 가려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2.12가 비난받고 있는 것도 김종필과 같은 지휘체계 파괴다. 10.26 당일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행적은 전두환 뿐 아니라 상당한 국민에게 의심 받을 점이 있었다. 정승화는 적절한 시기, 예를 들어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12월6일 후 계엄사령관, 육군참모총장직을 던졌어야 한다.
그랬다면 12.12라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2.12는 군 내부의 서로간의 오해와 편견, 무지와 나태가 복합되어 나타난 최대의 오점이다. 당시에는 이를 변명···옹호하는 주장이 판을 쳤지만, 문민화 이후에는 이를 군사반란으로 몰았다. 김영삼 정부 때는 심지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와 법리까지 나왔다.
이 모든 것은 불필요한 논란이요 시간낭비다. 이를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쿠데타는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는 것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참군인 이종찬 장군이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한 것은 “한번 일어난 일은 두번, 세번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본의 소화 군벌사에서 확실히 읽었기 때문이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시하라 간지가 작전부장으로 류타우꺼우(柳條湖, 유조구)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관동군에 가자 작전참모 부토오 아키라(武藤 章)중좌는 “우리는 각하가 하던 대로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꾸하였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이대로 패망까지 내달린다. 일본 육사 49기인 이종찬은 이 과정과 폐해를 몸으로 겪은 군인이었다.
“당신을 체포합니다. 구속영장은 이미 청구되었고, 당신의 혐의는 분명하여 영장이 발부될 것은 분명하니 당신을 체포합니다.” “그런데 영장은?”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곧 도착할 것이 분명할 것으로 가정해서 당신을 체포합니다.”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너희들의 개인적인 가정(假定)과 전제(前提)에 의해 그 책임을 방기할 수는 없다.”
정승화의 항거는 맞았다. 많은 육사출신이 이 허구-말이 안 되는 소리-를 정당화하기에 동원되었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다.
지록위마(指鹿爲馬)하는 양심의 고통을 청백대열, 육사출신들이 다시는 겪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