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이후 장군②류병현] 한미연합사 창설···채명신 이어 베트남 맹호사단장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류병현은 충북 청원 출신으로 동경이과대학 유학 중 징집된 학도병이었다. 육사 7기로 임관하였는데, 이때 중대장이 박정희였다. 휴전 후 류병현은 기갑병과의 창설과 육성에 공이 많았다. 월남전에서는 채명신 후임으로 맹호사단장이 되었다.

한미동맹은 1954년 성립되었지만, 한미연합사는 1978년에야 창설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연합사 창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역시절 미 고문관과 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작전통제권을 연합으로 행사하는 초유의 실험에 미군이 과연 응할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 류병현은 한미연합사가 NATO와 같은 기능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작전권을 한미연합으로 행사한다? 당시 미군들은 거의 생각지도 않던 방법이었다. 이 어려운 과제를 추진하여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는 大役事를 이루어낸 데는 류병현의 공이 크다. 한미연합사 체제는 한미 양국군을 2인3각 관계로 묶어 놓은 것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한미동맹을 확고하게 증거한다.

한미연합사가 창설되기 전 한국군을 작전지휘하는 유엔군사령부나 미 8군사령부에는 한국군 참모가 한 명도 없었다. 1971년 창설된 한미 1군단에 소수의 한국군 장교가 보직되어 있어 이재전 장군을 비롯하여 그 후 국군의 수뇌부로 성장하게 되는 엘리트가 포진하고 있었다. 한미연합사 창설에는 유엔군사령관 스틸웰 장군의 이해와 협조가 컸다. 스틸웰 장군은 1976년 북한군의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을 때 단호한 보복 위협으로 6.25전쟁 이래 최초로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낸 맹장이었다.

연합사를 창설해 나가는 초기단계에 미군도 그 기능과 위상을 정확하게 잡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이 연합사부사령관의 집무실을 유엔군사령부 주임상사 방으로 잡았던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가운데서 연합사가 한미연합군 군령최고사령부라는 위상을 확립한 것은 류병현의 치밀한 노력이 컸다. 영어와 한국어가 같이 공용어가 된 것도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이 이러한 대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시시콜콜 알기 어렵다. 실제에서 일을 해나가는 실무자들에게는 일일이 물을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고민이 많다.

류병현이 채명신의 뒤를 이어 맹호사단장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류병현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주월한국군은 채명신 장군의 일관된 논리와 노력으로 최초부터 독자적 작전권을 행사하였다. 맹호사단장으로서 류병현은 미군과 협조관계를 잘 유지하였는데 이 역시 한미연합사를 이루어나가는 데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1968년 1.21사태로부터 경계·방위태세의 전반적 쇄신, 1974년 율곡계획의 시작, 다시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로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미증유의 참사를 당해서도 군이 흔들리지 않고 대북억제태세를 유지하였던 것은 한미연합사가 확고하게 기능하고 있었고, 특히 중일전쟁, 6.25전쟁, 월남전쟁에 참전하여 위기관리에 익숙한 류병현이 지키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한미연합사 창설로 대미를 맺었다. 류병현 장군은 그 산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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