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윤성근 판사···”‘공통상식’이 ‘건강사회’의 비결”
[아시아엔=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윤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11일 오전 암 투병 중 별세했다. 향년 63세. 윤성근 충북 청원 출신으로 충암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 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고교 및 대학 모두 1년 후배다.
윤성근 판사의 생전 칼럼 등을 엮은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바른디자인 출간)을 비롯한 책 3권이 있다.
컴퓨터 등 IT기기를 잘 다루기로 사법부 내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강진구 판사가 출판 사상 최단기간(48시간 이내)에 윤성근을 위한 첫 출간을 맡았다.
거기에 윤성근 판사와 필자의 인연을 소개한 글도 한편 실려있다. 필자의 ‘주충우돌(酒衝右突)’에 실은 송도사(송종의 전 법제처장) 편 13개 글 중 인혁당 재판에 관한 글을 본 윤 판사가 몇 대목의 오류를 지적한 사연이다.
윤 판사는 1998년 인천지법 판사로 임관해, 2015∼2017년 서울남부지법원장을 지낸 바 있다. 이후 재판부 업무에 복귀해 발병하기 전까지 매끄러운 재판 진행과 주옥같은 판결문과 명칼럼을 남겼다.
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 한국국제사법회·국제거래법학회 고문을 역임했다.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전문가회의 대표단을 맡아 국제 상거래법 전문가라는 호평을 받았다.
강민구 판사가 보낸 윤성근의 강연 녹취록에서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데, 담담하게 어려운 법에 관한 얘기들을 쉽게 푸는 신통함을 맛볼 수 있다.
송종의 처장은 출판 비용으로 1000만원 넘게 지원하며 강판사의 출간 작업을 남모르게 지원했다. 윤 판사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도 인정을 잃지 않았다.
윤 판사는 책 인세로 받은 돈 중 2000만원을 북한인권단체 ‘물망초’와 자폐인을 지원하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에 기부했다.
그가 고위 법관으로 있을 때 함께 근무한 배석판사들은 법리에 밝고 세상사에도 해박한 그를 존경했다.
무엇보다 실력이 있는 법조인들은 항용 그러하듯 차가운 지성만 날카롭게 벼르고 별렀지 인간미는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윤성근은 그렇지 않았다. 동료나, 특히 후배 법관들은 그의 따듯한 인품에 매력을 느꼈다는 추모담이 가득하다.
필자는 어제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다녀왔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빈소는 썰렁했다. 코로나가 위세를 떨쳐서도 그렇지만 늘 본인상에 가보면 염량세태를 느끼는 때가 많다.
훌륭한 사람이 너무 빨리 하늘의 별이 된 것을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번잡한 세상사를 뒤로 하고 훌훌 육신의 고단함을 벗어버린 걸 축하해줘야 할지도…
“법치주의(Rule of Law)는 현대 민주주의 핵심적 원칙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의 이름을 써내려갔던 그 갈망과 열정이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면 법치주의를 향한 공감과 믿음의 확산이 민주주의를 꽃 피울 것이다.”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표지에 실린 그의 글이다.
“다수결이 남용되면 다수의 독재가 발생하며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먼저 토론과 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선의로써 성의껏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구성원들의 이런 자세는 그 사회의 민주적 성숙도를 보여준다.”
이 책의 166~167쪽 ‘다수결의 한계’라는 칼럼에 나온다.
“원칙적으로 각자의 양심은 존중돼야 하지만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이유로 법관이 재판에서 따라야 하는 양심은 개인적 양심이 아니라 직업적 양심이다.”
이 책의 154쪽에 실린 준거틀마다 다른 상식, 헌법과 법률에 기초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탁견을 함께 지적했다.
윤성근 판사는 구성원이 동의한 ‘공통상식’이야말로 ‘건강사회’로 가는 비결이라고 웅변한다. 그리고 기득권 남용을 억제하기 위해선 배려, 양보, 관용이 꼭 필요하다는 점도 역설한다.
만해 선사의 님의 침묵을 본 뜨는 게 이상하지만 그렇게 해보련다.
성근은 갔지만, 나는 성근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그가 지핀 법치의 불꽃이 우리 사회에 활활 타오를 때까지 나는 그를 보내지 아니 하렵니다.
…내 정수리에 법치의 불꽃이 완성된 형태로 들이박힐 때까지 나는 그와 이별을 하지 않을 거외다.
윤성근 판사! 그래도 하늘나라로 가서 편히 쉬기를 빈다.
벗이자 그대를 존경하고 어려워 하는 ‘누운 구름’ 최영훈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