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 ‘오적’ ‘타는 목마름’ ‘생명사상’ 남기고 하늘로
동학 인내천에 터잡은 생명사상 정립…하늘나라서 배필 김영주와 재회하시길
1970년 <사상계> 5월호, 일찌기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시가 실렸다. 아니, 판소리의 아니리와 같은,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설을 엮은 듯한 시였다. 그 시를 나중에 평론가들은 담시(이야기 시)라고 규정했다. 다섯 부류의 나라를 좀 먹거나 해치는 적들이었다. ‘오적’은 300줄 남짓 결코 짧지 않은 산문형 풍자시다. 담시라고도 했다. 부정한 수법으로 부를 쌓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들을 을사오적에 빗대 꼬집었다.
김 시인은 오적을 쓸 때 “접신이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 “어떤 영적 흥분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신명이 내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아니리와 같이 사설을 읊듯이 리드미컬하게 판소리 가락을 살린 독특한 문체였다. 일상에서 쓰지 않는 난해한 한문을 옥편에서 공 들여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차용해 한껏 풍자했다.
수사당국은 <사상계> 폐간에 이어 오적을 실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까지 압수하며 탄압했다.
김 시인을 비롯해 사상계 대표와 편집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해 수감됐다.
담시 ‘5적(五賊)’을 실은 <사상계>가 날개 돋친 듯 팔리려던 즈음, 그 잡지는 판금돼 세상에서 사라졌다. 70~80년 대를 관통해 대학가 운동권에선 김지하 시인이 ‘내지른’ 오적의 등사본이나 필사본들이 나돌았다.
시를 쓴 시인은 그 무시무시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영어의 몸이 됐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 푸른 남산(중앙정보부)의 지하감방에 갇혀 혹독한 고문도 당했다. ‘오적’의 시인, 1970년대 저항문학의 아이콘 김지하가 8일 오후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최근 1년여 동안 암에 시달리며 투병생활을 했다고 토지문화재단은 전했다.
고인의 임종은 차남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관장 부부가 지켰다.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는 “지하(地下)에서 활동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한자는 지하(芝河)이지만… 이름처럼 고인은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맹렬하게 저항하다 순교할 뻔한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1941년 전남 목포시에서 태어나 원주로 옮겨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 중동고를 졸업한 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도 참여했다. 아버지는 전기 기술자, 할아버지는 동학운동을 하다 일본으로 피신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에서 조사를 썼다가 구속됐다. 반정부 활동으로 그때 4개월간 투옥됐다. 첫번째 형극의 시작이었다.
김지하는 1969년 시인 조태일이 발행하는 시 전문지 <시인>에 다수의 시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석방-재수감을 되풀이하며 유신독재 정권 때 고난의 연속이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수배를 피해 항만 인부나 광부로 일하며 도피생활도 했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직후 무기로 감형됐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돼서야 고인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날 수 있었다. 2015년 오적 필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15억원 배상판결이 선고됐다.
고인은 한국의 70년대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75년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폭로하는 신문 연재 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의 삶은 도피, 체포, 투옥, 고문, 사형선고, 감형, 사면, 석방의 연속으로 점철됐다.
75년 출간한 ‘타는 목마름으로’(창비)가 대학가 주변 서점에서 단 이틀 만에 2만권 넘게 팔렸다. 그의 사면을 촉구하기 위해 ‘김지하를 구원하는 국제위원회’까지 결성됐다. 세계적인 실존 철학자 폴 사르트르와 미국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도 참여했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이후 분신, 투신이 대학가 등에 잇따랐다. 김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조선일보에 게재해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아니 전후해 고인은 비로소 생명사상으로 돌아서게 된다.
1980년대 이후 동학에 터잡은 생명사상 정립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고인은 옥중에서 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독학으로 생명사상을 깨우쳤다. 선불교, 동학, 생태학 책을 섭렵한 그는 생명사상과 관련된 종교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고인은 자신의 시 ‘생명’을 조용필에게 건네 같은 제목의 노래로 만들게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원주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한 조용필을 집으로 불러 고인이 이 시를 주었다.
그러나 이 노래 ‘생명’의 작사자는 김지하 시인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 모친인 고 전옥숙으로 돼있다. 김 시인의 이름 석자가 들어갔다면 당근 금지곡으로 됐을 거다. 전옥숙은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 ‘김지하구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그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고인은 율려와 후천개벽 같은 민족음악과 사상을 설파하는 책들도 펴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후 진보좌파 진영에선 그를 변절자로 몰아붙였다. 그의 사상 궤적은 좌에서 우로 때로 극과 극으로 오가는 듯했다. 좌우 대립이 격렬한 이 땅에서 양쪽 모두가 기피하는 생명평화와 중도사상으로 달렸던 사상가.
그에 대해 뭐라고 평하든 관계없이 김 시인은 현대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시인뿐만 아니라 생명사상을 쉽게 풀어낸 사상가로서도 그는 이름을 떨쳤다.
“굉장한 존재다. 문화예술운동에 있어 선구적이고, 저항정신뿐 아니라 선구안까지 가졌다.”(평론가 백낙청)
“70, 80년대 전국적인 문화운동 배후랄까, 사령탑과도 같은 엄청난 존재였다.”(작가 황석영)
70년대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차원을 넘어, 고인은 사상가로서도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긴 거목이다. 수배받던 시절, 고인은 소설가 박경리(2008년 타계)와 딸 김영주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다. 이 일을 계기로 73년 명동성당의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김영주와 결혼하게 된다.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된 1974년, “꿈속에서 내내 아내 울음소리만 들렸다”던 그의 아슬한 도피 생활… “내가 혹시 잘 못 가고 있는 건 아닌지…”라고 체포 당시를 술회한 김 시인의 고뇌.
김 지하는 저항하는 투사이기 전에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면모의 고뇌하는 한사람의 지식인이었다. 양친이 통영(선친-욕지, 모친-추도) 출신인 필자는 부인(김영주 관장, 2019년 별세)과도 각별했다.
불화 연구 등 불교미술사에 정통했던 김영주가 펴낸 <한국미술사>(나남신서)는 역작으로 통한다. 김 시인은 60년대 후반 서울 문리대 연극회에서 문화 영역의 운동권 후배들을 키웠다. 그림의 오윤, 노래 김민기, 춤 이애주, 창작판소리 임진택, 탈춤 채희완, 국악하는 김영동까지…
유홍준은 “민족예술 1세대가 곧 김지하 사단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라고 말한다. 80년대 지성사 한 페이지를 장식한 미학과 예술론의 방대한 성과 중 상당부분은 고인의 덕분이다.
“73년 무렵 장남 원보가 태어난 직후 검거돼 재판받을 때 소설가 김승옥이 법정에 서 ‘이 사람 빨갱이 아니다’는 증언한 기억이 난다.”(작가 김훈, 기자 때 체험담)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을 저변에 널리 알린 것도 고인의 공적 중 하나라고 평론가들은 입을 모은다. “1970년대 시인뿐 아니라 논객조차도 군부세력을 비판하는 글과 시를 못 쓰던 시절 고인은 시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오적’을 발표한 고인은 유신 시대의 지성이다. 고인만큼 정치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당시 폭발적인 문인은 없었다.”(예술원 전 회장 이근배)
“그야말로 대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이 떠나갔다.”(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고난의 1970년대를 몸으로 겪은 우리들로선 김 시인에게 빚진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려대 명예교수 서지문)
김 시인과 동지들이 살이 찟기고 뼈가 부서지는 저항을 했기에 오늘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거다.
그가 남긴 시집으로는 <황토> <대설 1~4권> <애린> <중심의 괴로움>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 등이 꼽힌다.
수운 최제우를 다룬 장시 ‘가문 날에 비구름’, 이야기 모음 ‘밥’과 ‘남녘땅 뱃노래’도 걸작이다.
문학적 회고록인 산문집 <흰 그늘의 길>(전 3권) 등도 읽어볼 만하다.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공초문학상, 시와 시학상 작품상, 만해대상, 민세상을 받았다.
고인은 노벨문학상·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몇 차례 오르내리기도 했다.
김 시인은 90년대 절제 분위기가 배어난 내면의 시 세계를 선보였다. 1992년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한 바 있다.
‘화개’(2002년), ‘유목과 은둔’(2004년), ‘비단길’(2006년), ‘새벽강’(2006년), ‘못난 시들’(2009년), ‘시김새’(2012년) 등을 꾸준히 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끝으로 절필했다.
명지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국대, 원광대에서 석좌교수를 지냈다.
좌우의 대립으로 역사가 화석처럼 굳어버린 시대를 만년의 고인은 살았다. 당나라 이후 선승들이 각축한 선문답을 가려 뽑은 <벽암록>의 첫머리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연기는 소뿔처럼
단단히 하늘에 걸리고
모든 확실한 것만 남아서
연기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 끝머리는 다음 글로 맺는다.
-캄캄한 절벽이다-
암흑의 뿌리가
바람에 불리고 나면
거기 바다같은 절벽이
바다같은 미소로 서 있다
고인이 짓고, 조용필이 노래한 ‘생명’의 첫 머리에도 바다가 나온다.
저바다 애타는 저바다
노을바다 숨죽인 바다
납색의 구름은 얼굴 가렸네 노을이여 노을이며
물새도 날개 접었네…
눈부시어라 생명이여 생명이여
물결에 달빛 쏟아지네
애기가 달님 안고 파도를 타네
애기가 별님 안고 물결을 타네
대지여 춤춰라 바다여 웃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