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의 난초 그림 보며 온갖 상념에 젖다

김지하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그려 보낸 난초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1983년 초겨울이었다. 철학과 윤구병 교수가 일부러 연구실로 찾아와 무언가를 주고 간다. 누런 봉투안에는 난초 그림 한 장, 김지하 시인이 쳐서 인편에 보낸 문인화였다. 낙관 대신 손가락 무인을 찍었다.

김 시인은 당시 원주의 현자 무위당 장일순 선생으로부터 난초 필법을 배우고 삶의 가르침도 받았다. 지학순 주교에게 가르침도 받았다. 지하의 난초 필법은 무위당의 그것과 판박이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을 드나들 때라 이 난초치기가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조선일보에 야릇한 칼럼을 올리면서 이후로 쓰는 글들이 해괴하고 예전 지하의 포부와 식견은 전혀 아니었다. 강의도 글도 너무 어렵고 난삽해서 종잡을 수 없는 묘한 관념의 덩어리였다.

그의 일탈은 갈수록 도를 더해가서 이후 박근혜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이제 우리 역사는 여왕의 출현시대가 왔다며 호들갑스런 망언과 망발을 보여주었다. 원주로 찾아온 박근혜를 정중히 영접하며 그 기사로 화제가 되었다.

예전 <황토> 시집 시절의 김지하는 완전 소멸되었다. 영락하고 속물적 형상만 남아서 뜻있는 세인들의 조롱꺼리가 되고 말았다.

나는 오래도록 벽에 걸어두었던 김지하의 난초를 내려서 안 보이는 곳으로 감췄다. 그러다가 최근 그걸 어디서 다시 찾아내고 아예 액자는 부수어 불태우며 난초그림은 배접을 칼로 오려서 또 어딘가에 넣었다. 전혀 보고싶지 않은 것이다.

‘오적’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을 당시의 김지하(왼쪽)

한 인물의 행적과 발자취가 빛난다면 그가 남긴 글씨나 흔적의 값어치도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김지하의 난초는 빛을 잃었다. 무위당의 난법을 이어받았지만 단순모방이요, 삶은 족탈불급이다.

1995년 무렵,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 김지하도 가족 숫자대로 신청해서 받아챙겼다. 지난날의 그 맑고 헌걸차던 문학정신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내가 받은 난초 그림의 화제(畵題)는 ‘암중불견암전물’(庵中不見庵前物), 즉 암자 속에만 들어앉아 있으면 암자 앞이나 주변의 정황을 전혀 모르게 된다. 말하자면 사고의 편협성이나 근시안, 청맹과니의 어리석음을 조심하라는 경구다.

이 말은 당신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영남대 석좌교수를 지낼 때도 영남유학사상사를 정리한다며 수십억짜리 대형 프로젝트를 꾸며서 신청했었다. 결국 채택이 되지 않았지만 돈이 되는 기회포착에 대단히 민첩한 분이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 변해버릴 수가 있는가?

계해년, 그러니까 1984년 12월에 받은 그의 난초그림을 보면서 온갖 상념에 젖는 아침이다.

김지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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