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시가 있는 풍경]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
처음 스승을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스승은 그렇게 백수로 사셨다.
백수로 사셨기에 만날 사람 자유로이 만나셨고
백수였기에 우리 또한 자유롭게 뵐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한 돈벌이를 갖지 않았으니
당신의 삶을 저당 잡히지 않으셨고
밥을 사고팔지 않으심으로 밥 속에 든 하늘을 보셨다.
백수였기에 얽매이지 않으셨고
백수였기에 하는 일없이 하실 수 있었다.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음으로써
절로 이루어짐을 즐겼다.
스승은 백수였기에 정신없이 달리지 않을 수 있었고
느릿느릿 걸으시거나 멈춰 서서
나무도 보고 풀꽃도 만나며
사람과 세상을 깊이 보듬어 안으면서
땅과 하늘을 함께 바라볼 수 있었다.
스승은 백수였기에 가진 것이 없었고
가진 것이 없어서 더욱 풍요로울 수 있었다.
자동차가 없어 걸어 다니는 수고는 하였으되
자동차에게 소유당하는 수모는 겪지 않으셨다.
백수였기에 깊은 산골에 핀 난초의 향기로움을
저자거리 한 가운데서도 나눌 수 있었다.
백수였기에 멈춘 자리에서 우뚝한 나무가 되셨고
백수였기에 걸림 없는 바람이 될 수 있었다.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
스승의 스승 또한 백수였었다.
스승을 닮아 살고자 하는 나 또한
다행히 처음부터 백수이다.
2004년 5월 22일
선생님 10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