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신동엽과 시인들,?애틋하던 그날은 어디로?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이란 이름은 저 바람찬 1980년대, 30대를 보내던 나에게 하나의 신화적 존재였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일화들, 옛 백제 숨결이 살아 숨쉬는 부여, 대학시절 진작 민족사의 슬픔을 경험한 시인, 그 악명 높았던 국민방위군 체험, 병사들 양식을 모조리 훔치고 착복했던 악질 방위군사령관 김윤근, 그게 탄로 나서 총살 당한 못난 사령관, 그 국민방위군이 해산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허겁지겁 먹었던 민물게, 배가 고파서 먹었던 갑각류 게, 거기 달라붙었던 디스토마 유충이 시인의 간으로 찰싹 옮겨붙었던 비극, 그게 결국 시인을 무참히 쓰러뜨릴 줄이야.
이 한번의 실수로 시인의 여생은 노루꼬리만큼 짧고도 슬프고 허전했다. 이후로 했던 시인의 일이란 학교 교사, 헌책방 운영, 교육평론사 기자 체험, 나중에 아내가 된 여고생 인병선을 만난 헌책방 서가 앞에서의 고운 인연, 이 모든 것은 시인 신동엽의 탐구적 열정과 고결한 영혼의 알몸을 보여준 것이다.
장마철의 무거운 하늘처럼 건강이 차츰 악화되고 먹구름 끼는 환경에서도 시를 향한 집념은 화산처럼 끓어올라 데뷔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비교불가의 절창이다.
이들을 모은 시집 <아사녀>, 장편 서사시 ‘금강’을 서둘러 엮어낸 뒤 마치 어딘가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는 듯이 서둘러 가신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리운 그 이름 신동엽!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서른여덟. 어린 세 자녀와 고운 각시를 두고 어찌 그리 먼 길을 아주 떠나버리셨는가? 아니면 가셨다가 돌아오는 길을 잃어 아직도 연옥의 미로 속을 혼자 허청허청 헤매고 다니시는가?
나의 젊은 날은 시인이 남긴 작품과 시집을 표지가 닳도록 읽고 사랑하고 흠모하며 시인의 영혼까지 깊이 몰입하였음을 고백하노니 어느 해 봄, 시인의 고향 부여 동남리 절창 ‘산에 언덕에’가 새겨진 신동엽 시비를 찾아 백제 곰나루와 파릇한 쑥이 눈물겹게 돋아나는 그윽한 봄길을 다녀온 적이 있나니 틈만 나면 그때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함께 갔던 문단 선후배들의 면면을 살펴보나니 무심한 세월은 또 흐르고 흘러 어느 덧 그 시절이 물경 30년도 훨씬 전이었구나.
민영 시인, 작가 현기영, 시인 조재훈, 신동엽 시인의 꽃각시 인병선, 젊은 시인 김용택은 아직 머리숱이 검었고 한없이 선량했던 시인 이광웅, 청년 시인 박선욱, 고인이 된 김이구, 시인 박철의 앳된 얼굴도 보이고 사진의 원판이 흐려서 누가 누구인지 희미한데 나는 30대 후반 청주 충북대 교수로 교단에서 시를 가르치던 청년 시인의 하나였으니 제자 구영일과 더불어 부여 옛 땅을 찾아 애달픈 흠모의 정을 느끼며 백제의 바람을 마셨지.
애틋하던 그날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사진 속 얼굴들은 상당수 멀고 먼 저승길로 신동엽 시인을 만나러 떠나고 나머지는 아직도 이승의 진창길을 허둥지둥 터벅걸음으로 헤매고 있나니 무심한 세월은 우리를 소몰 듯 고삐를 잡아당기며 채찍질도 해대며 대체 언제까지 시달림 속에 휘몰아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