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 한 장을 가만히 음미하듯 들여다 봅니다. 칼라가 나오기 전 길거리 스냅으로 찍은 흑백사진이고 숱한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풍랑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있지요 원래 매끈하고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가만히 음미하듯 들여다 봅니다. 칼라가 나오기 전 길거리 스냅으로 찍은 흑백사진이고 숱한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풍랑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있지요 원래 매끈하고
1959년 봄입니다. 화단의 꽃들이 피어나는데 큰 누나가 혼례식 올리는 날입니다. 이 행사를 위해 아마도 보름 전부터 준비했을 것입니다. 각종 도구와 재료 구입 이 분야 전문기술자의
그 모진 겨울을 견디고 드디어 마당귀에서 가만히 고개를 다소곳 내미는 장엄한 모습! 묵묵한 인고(忍苦)를 일깨워주는 너의 모습이 아름답구나.
대구 종로초등 옆 서내동 긴 골목 끝집에서 두 해를 살았지요. 수창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각종 철공소 철물점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 서성로 큰 길을 건너 문성한의원
저는 이 사진을 좋아합니다. 볼 때마다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깃을 목까지 세워 올려 입은 검정색 오버코트에 갈색 중절모, 동그란 로이드 안경, 이것만 봐도 은근한 멋쟁이셨던 듯합니다.
오늘은 1930년대의 대구 청년 김학봉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식민지시대의 청년기를 멋지게 구가하던 김학봉 사진들을 기억하시지요? 선생은 대구 마당발이었습니다. 걸출한 가요황제 남인수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 가야산
1930년대 대구의 자본가 자제들은 식민지의 내막과 참상을 잘 모릅니다.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겠지요. 총독부 관제언론의 보도에만 익숙해 있었고 세상 돌아가는 구체적 사정에도 무관심했을 테지요.
지금은 빛 바랜 예전 흑백사진에는 꼭 정겨움이 묻어나는 글귀가 있었지요. ‘1937년 2월’이라고 표시된 이 사진의 글귀는 “푸른 물도 한 구비니 청춘도 절로 절로” 이런 4.4조
소한(1월 6일) 대한(1월 20일) 다 지나 입춘(2월4일) 앞두고 한반도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한반도의 기후변화도 심각할 정도입니다. 대구는 화분 형태를 닮아 분지(盆地)라 불렀고 여름엔 폭염, 겨울엔 엄동으로 유명했지요. 그래서
예전엔 도시근교의 강에 나가 연인, 친구들끼리 어울려 보트를 즐겨 탔습니다. 친구는 같은 배를 타고 인생이라는 강을 함께 건너가는 그런 상징적 관계를 말하지요. 그런 점에서 보트는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얼핏 보아서 가야산 홍류동 황계폭포이거나 포항 내연산 잠룡폭포 같습니다. 다시 보니 신불산의 파래소 폭포로 보입니다. 세상이 혼탁하던 1937년 무렵입니다. 폭포는 김수영 시에도
옛부터 높은 산을 오르면 완등의 기쁨과 감격을 표시하지요. 어떤 이는 절규와 환호로 또 어떤 이는 눈물과 통곡으로 그간의 고통과 힘들었던 과정에 대한 사무치는 표현을 다양하게
이 사진은 한국등산사에서 역사적 증거가 될 만한 자료입니다. 1937년 대구 청년 김학봉과 두 친구들은 등산장비를 갖추어 모였습니다. 대구의 북쪽 도학동의 팔공산으로 접어들어 방향을 염불암 코스로
드디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모두들 힘든 시간 살아오느라 노고가 많으셨다. 지친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우리 발자국이 등 뒤로 길게 찍혀 있는 게 보인다. 깊은
경남 성주에서 태어난 김학봉(1925~2014)은 1973년 경남 김해에 타일업체인 한영요업을 설립하고 1980년대 모자이크 타일의 대형화를 주도했다. 1986년 자신의 호를 딴 우송장학회를 설립해 대구·경북지역 유도 특기생들을 지원했으며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