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1950년대 중반 대구 거리 ‘남매’ 풍경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가만히 음미하듯 들여다 봅니다.
칼라가 나오기 전 길거리 스냅으로 찍은 흑백사진이고 숱한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풍랑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있지요
원래 매끈하고 반짝였을 표면이 거의 구겨지거나 잔주름, 혹은 긁힌 자국으로 가득합니다.
바위도 주름이 진다는데 조그마한 종이사진 한 장이 지금껏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장한 데요.
긴 세월의 온갖 위험과 부대낌 다 견디고 그때 그 시절의 영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큰 누나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마치 어머니처럼 온갖 집안 일을 돌봅니다. 언제나 우뚝하고 든든한 기둥이나 대들보 같았습니다.
어딜 가는 길이었는지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하여간 바쁘게 걸음을 옮깁니다.
저의 나이 일곱 살 무렵 대구 수창학교 갓 입학한 직후로 보이고 누나는 20대 중반으로 짐작됩니다. 전매청 엽연초제조창의
권련 만드는 생산현장 노동자였습니다.
어느 겨울 휴일을 맞아서 시장을 갔거나 생필품 사러갔을 것입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누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어떤 물품 구입 차 길을 나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귀 덮는 털모자를 쓰고 허리에 조임 버클이 달린 한 벌 짜리 골덴 옷을 입었네요. 갈색 모자는 기억나는데 옷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모자 이마 쪽엔 반짝이는 별 세 개가 달려 있고 육군 중장 계급으로 제법 위풍당당합니다. 목에 머플러까지 싸맨 걸 보면 누나가 막내동생을 위해 미리 찬 바람 막아주는 배려를 한 것 같습니다.
누나는 속에 한복 차림이고 바깥으로는 여성 코트를 입었네요.
한복 속바지와 버선 코고무신이 밖에 드러나 보입니다.
누나가 걸음을 재촉하는데 막내는 자꾸만 먼산바라기를 합니다. 누나는 막내 손을 꽉 잡고 오직 전방만 골똘히 주시하며 바쁘게 길을 갑니다.
사진 속의 거리가 대구의 어디쯤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신사복 부인복 드라이라고 쓴 세탁소 간판과 유리점 간판도 보입니다.
길 건너편 지물포 앞으로는 저보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걷는 몇몇 행인들이 보입니다. 높다란 나무 전봇대와 우중충히 낡은 일본식 목조 이층 건물이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1950년대 중반 대구의 거리 풍경입니다.
그때로부터 불과 9년 전 바로 저 길에서 1946년 대구 시월항쟁이 일어났었지요. 당시 미군정의 양곡정책에 저항하는 진보적 시민들의 집단시위가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경찰과 맞서 싸우다 경찰의 발포로 많은 군중이 희생되는 대참극이 발생했던 지역이지요.
올해 아흔 넘으신 문태갑 선생 증언에 의하면 경찰의 총에 맞은 좌파청년들 시신이 하수구에 겹겹이 처박힌 참상을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그 시절 대구는 격정과 변혁의 꿈으로 들끓던 불안한 혁명의 도시였지요. 이승만 조봉암이 대결했던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의 전국득표율은 불과 30%, 그런데 대구에서만 70%를 얻었는데 이에 분노한 이승만은 대구를 ‘한국의 모스크바’라 했답니다.
4월혁명의 잉걸불이 된 2.28 학생의거도 그런 대구 기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1961년 5월 군사쿠데타 이후 대구는 점차 보수 우경화의 벽창호 기질로 뚜렷하게 변질되어 갔습니다.
사진 속에서 그날의 햇빛은 어둡고 침울하게 느껴집니다. 찬 바람 싸늘하게 몰아치는 삭풍의 거리를 많이도 걷고 걸어 오늘에 이르렀네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뿜어내는 세월의 빛깔과 향기를 읽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