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시인 젖먹이 때 떠난 모친, 71년만에 남편과 해후하고…

1959년 대구 서내동 시절 이동순 시인과 부친 이현경 선생

아버님 가신 지 25년, 어머님은 떠나신 지 71년. 경북 김천 상좌원 고향 마을, 두 분은 너무 오래도록 멀리 떨어져 계셨다. 아버님은 성주골, 어머님은 나정지. 2022년 10월 26일 오전 두 분 유택을 옮겨서 한 곳으로 모셨다. 그게 너무 기쁘고 흐뭇하다. 남북으로 갈라진 부부가 수십 년만에 만나듯 영계(靈界)의 두 분이 수십년 만에 한 방으로 입실하신다. 가실 곳은 경북 군위가톨릭묘원 양지바른 곳. 꽤 서먹하고 낯설고 어색하시리라. 생사가 나뉜 지 워낙 오래라 서로 알아보시기나 할까.

평생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시인 어머님(김기봉) 묘소에서 나온 거무스르한 흙. 유골이 자식을 사랑으로 품고 흙과 더불어 숨 쉬고 있었을 터다.   

내가 태어난 지 10개월에 돌아가신 어머님 무덤을 열면 혹시 유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뼈를 두 볼에 대고 마구 비벼 보리라. 얼굴도 모르고 젖도 못 빨아보고 안겨보지도 못하고 목소리도 기억 못하는, 그래도 평생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내 어머님을 만나러 오늘 날 밝으면 길 떠난다. 눈을 좀 붙여야 하는데 가슴이 설레고 잠이 안 온다.

이장을 앞둔 어머님께 절 올리는 이동순 시인

오늘 부모님 묘소 이장을 앞두고 가슴이 설레어 간밤 겨우 1시간 남짓 살풋 눈을 붙이고 길 떠났다. 아침 9시, 일꾼들과 만나 먼저 나정지 산등성이에 계신 어머님 묘소부터 열기로 했다. 가시덤불 우거진 산길을 낙엽에 미끄러지며 겨우 올라 어머님께 두번 절 드리고 놀라지 마시라고 더 편한 곳으로 모신다고 크고 다정한 목소리로 알려드렸다.

                               일꾼들이 시인 어머니 묘소를 파내려가고 있다.
 
이윽고 일꾼들이 삽을 들고 봉분의 한 가운데를 집중적으로 파내려간다. 곧 마사토가 드러나고 습기는 없다. 깊이 파들어갔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일꾼들이 말을 들려준다. 묻히신 지 71년 된 어머님은 완전히 흙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신 몸의 흔적을 빗자루로 쓸듯 없앴다.

칠성판 조각들 

한지를 펴서 약간 거무스름한 흙을 모아 거기 두어 줌 정도 담았다. 그걸 그대로 항아리에 넣는다고 한다. 혹시라도 유골 조각이 나오길 기대했는데 어머님께서는 아주 정갈하게 당신 자리를 거두셨다.

시인이 어머님 계시던 곳에서 숨결을 느껴본다. 

어머님 계시던 구덩이에 들어가 어머님을 가만히 불러보았다. 어머님 육신을 얹었던 칠성판이 다 썩고 옹이 두개가 흙속에서 나오기에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옹이야, 소나무 옹이야~”
“너는 어머니를 눕히고 아주 흙이 되실 때까지 노고가 크고 많았구나.”
“네가 곧 어머니 육신을 대신하는 대지의 사리(舍里)로구나.”
“나는 너를 깨끗이 씻어 내 책상 앞에 두고 늘 바라보거나 자주 손바닥에 감싸 꼬옥 쥐어볼 거야.”

이동순 시인 부친(이현경) 산소

오전에 어머님 산소를 빠른 겨를로 열고 닫았다. 완전히 본태로 돌아가신 그 놀라운 감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처음엔 허전했지만 차츰 감격으로 실감했다. 이어서 고항 마을 성주골 뒷산 아버님 묘소로 장비를 꾸려서 올랐다. 입구 마을엔 인적이 없고 개들만 악을 쓰며 짖어댄다. 눈을 부릅뜨고 크게 녀석들을 꾸짖으니 삽시에 꼬리를 사타구니 사이로 감추며 숨는다.

일꾼들이 부친 묘소를 포클레인으로 파고 있다. 

일꾼들의 작은 포크레인은 산 입구 대밭 사이로 천천히 오른다. 길 중간에 돋아난 대나무를 톱으로 자르며 오른다. 산길 바닥은 간밤에도 멧돼지가 파서 일구었다. 땅속 벌레를 찾은 흔적이다. 포크레인은 잠시만에 무덤으로 올랐다. 아버님께 두번 절 드리고 놀라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최근 멧돼지가 허물었던 봉분을 열기 시작한다.

석관 뚜껑이 열린 시인의 부친 묘소

금방 구덩이가 생기고 아버님 묘소의 석관 뚜껑도 열린다. 관을 덮었던 붉은 명정의 빛깔이 드러난다. 일꾼이 직접 구덩이에 들어가 삽으로 흙을 걷어낸다. 묻힌 지 25년 된 아버님 유골이 드러났다. 살은 모두 육탈 되어 없고 뼈만 남아 있다.

한지 위에 곱게 모은 대퇴골, 팔, 정강이, 엉치, 두개골 상반, 턱뼈 등은 25년 풍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도 굵은 뼈만. 대퇴골, 팔, 정강이, 엉치, 두개골 상반, 턱뼈 등 일꾼은 조심조심 한지 위에 얹는다.

그런데 아버님 유골에 물기가 흥건하다. 석회를 다져올린 게 물이 고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님 두개골에 가만히 손바닥을 포갰다. 사랑과 위로와 존경심을 보내드렸다. 강렬한 고압전류가 느껴진다. 

파묘 후 수습한 유골을 담은 상자. 시인의 부친(이현경)과 모친(김기봉)은 양상추 종이 박스 안에서 71년 만에 함께 만났다.

일꾼은 흙으로 뼈의 물기를 낱낱이 닦았다. 이렇게 수습한 아버님 유골은 경남 의령농협 신반 양상추 박스에 담겼다. 일꾼은 어머님 묘소에서 수습한 어머님 유골 흔적 봉투를 그 안에 함께 넣었다.

양상추 종이 박스 안에서 두 분은 71년 만에 함께 만났다.
“여보, 이게 얼마만이랍니까.”
“당신 드디어 가까이로 오셨군요.”
“그간 파란곡절도 얼마나 많으셨나요?”
“제가 먼저 돌연히 떠나 정말 송구했습니다.”
“불민한 저를 용서해주셔요.”
이런 어머님 말씀이 귀에 쟁쟁 들렸다.

오전에 수고한 일꾼들을 데리고 김천 지례 흑돼지구이 식당에서 점심 대접한 뒤 바로 군위 가톨릭묘원으로 달렸다.

이제 새로 한곳에 모신 시인의 부모님을 돌봐줄 군위가톨릭묘원 원장 장영일 신부가 활짝 웃으며 시인 일행을 맞고 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그간 너무 멀리 떨어져 계셨다. 성주골 아버님 묘소는 그래도 고향마을 바로 뒷산이라 오르기 수월했는데 어머님 묘소가 있는 나정지는 가파른 산길이라 중간에 진창을 건너고 낙엽에 발이 미끄러지며 가시덤불에 찔리며 자주 독사가 출몰하기도 했다.

또 산 입구에 집이 들어서서 출입이 불편했다. 그 때문에 성묘갈 때는 아버님 묘소에 제물을 차려놓고 어머님께서 산 넘어 이리로 오시라며 소리쳤다. 그게 늘 마음에 걸리고 죄스러웠는데 이번에 두 분을 함께 한 곳에 합장으로 모시니 그 개운함, 그 후련함이란 이루 형언할 길 없다.

다만 아버님 묘소는 지척에 당신 아우님과 제수씨 무덤이 있었는데 거기 가서 참배하며 양해 말씀을 올렸다. “형제간에 가까이 계셨는데 또 작별입니다만 좋은 뜻으로 떠나시니 너그러이 받아주십시오.”

고향 마을을 떠날 때 전동 스쿠터를 탄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왔다. 지난 20년간 벌초와 관리를 도와주신 마을 노인 이삼화씨다. 차에서 내려 정중히 허리 굽혀 절을 드렸다.

간밤에 잠을 한 시간 밖에 못 자서 운전 중에 졸음이 쏟아져 너무 위험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눈을 조금 붙이고 또 바람처럼 달렸다. 묘원 원장 장영일 신부가 활짝 웃으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예전 산악자전거를 같이 타던 친구다.

일꾼들은 빠른 시간에 장례절차를 거쳐 화장 후 곱게 빻아 담은 유골 항아리를 하얀 보자기에 싸서 내게 말없이 건네 준다. 이제 부모님께서 함께 영면에 드실 곳으로 가슴에 항아리를 품고 올라간다. 신부님께서 간단한 기도와 강복을 주셨다.

유택에 들어선 시인의 부모님(이현경, 김기봉)

드디어 부모님께서는 나란히 한곳에 영면하실 유택으로 드셨다. 오랜 세월 멀리 떨어져 계시던 두 분께서 오늘부터는 나란히 한 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곳 작업자가 입구를 투명플라스틱으로 봉하고 바깥을 화강암 석판으로 막았다. 두 분 이름과 사진, 생몰연도를 새긴 석판은 한달 뒤에나 볼 수가 있다고 한다. 부모님께서는 오늘 밤 그간 쌓였던 장강대하 같은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누실 것이다. 두분께서 도란도란 나즉나즉 나누시는 그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머님께서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그 옆에서 아버님도 소리없이 우신다. 

날개가 어여쁜 나비 한 마리가 빨간 남천 열매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다. 가을볕이 한없이 따스하다.

71년만에 해후한 부부의 환생이런가? 남빛 나비와 붉은 열매가 부모님 새로 함께 모신 주변에서 평화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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