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시인·가객 이동순의 한국가요 재발견 ‘번지 없는 주막’

이동순 저 <번지 없는 주막>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백설희, ‘봄날은 간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본명은 김희숙이다. 전영록의 모친, 티아라 전보람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이 가사는 시인 100명이 선정한 최고의 노랫말로 뽑힌 바 있다. 묘하게 1절보다는 2절이, 2절보다는 3절 가사가 더 주옥같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구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 같은 정이었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믿겠소 못믿겠소 울던 사람아

– 백년설, ‘번지 없는 주막’ (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

2022년 7월 1일 홍천 샘골 캠프나비에서 열린 이동순-안도현-배일동의 ‘시와 삶’ 토크에서 자신의 시와 노래를 얘기하고 있는 이동순 시인. <사진 박창준> 

이동순은 굴곡도 사연도 많은, 현대사를 품은 노랫말을 아꼈다. 동순을 세간에선 ‘노래 부르는 가객’ ‘밤새도록 노래하는 사람’ ‘뽕짝을 3절까지 기억하는 기인’으로 친다. “당최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도 분간이 되겠나?” 이 말이다. 그는 문단에서 ‘걸어 다니는 노래사전’으로 불린지 오래다. 영남대 등 국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가요사를 새롭게 되짚어본 에세이 <번지 없는 주막>(도서출판 선)까지 펴낸, 둘도 없는 ‘가요 사랑맨’이다. ‘한국 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란 덧글이 붙었다. 책은 ‘번지 없는 주막’처럼 사라져간 가요사의 맥을 짚었다.

제1부 ‘노래여 노래여’, 제2부 ‘노래로 들어보는 한국현대사’, 제3부 ‘한국 가요사의 별’, 제4부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 제5부 ‘나의 대중가요 편력기’에 실린 ‘맨 처음 들었던 노래는 어머니의 음성’, ‘항구, 식민지 백성들의 정신적 갈망’,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노래방 문화와 나르시즘(자아도취, 자아집착)’ 등 67편의 글들.

이동순은 가요 300여 곡을 가사를 보지 않고 3절까지 부를 수 있다. 그것도 중학 3년때 모두 외웠다니…

이동순의 기가 막히는 회고담.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동해안 어느 골짜기로 숨어들어 아주 종적을 감추고 싶었던 시절, 산촌 골방에서 웅크리고 불렀던 노래는 힘과 용기를 회복시켜주는 활력소이기도 했다. 지금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우리 가요를 좋아하고 사랑하며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다.””우리 가요는 참으로 굴곡과 사연도 많았던 한국현대사의 험난했던 과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젊은이들에게서 과거를 외면 부정하려는 시각들이 발견되는 것은 안타깝다.”

그는 가요의 뿌리를 일터에서 불려지던 민요인 ‘노동요’로 본다.
“모야 모야 노랑 모야
네 언제 커서 큰 벼 될꼬”
– 50쪽, ‘부르는 노래의 여러 스타일’ 몇 토막

1970년대 끝자락. 이동순은 경북 봉화군 산골짝, 아는 사람 집을 찾는다. 그때 시인은 면소재지 정류장에 내려 들길을 걷는다. 저만치 길가에, 새벽까지 내린 봄비에 촉촉이 젖은 채 버드나무가 연초록 물기를 머금고 바람에 흔들린다. 하늘에는 따스한 봄 햇살과 함께 종달새가 지저귀고, 포근하면서 달디 단 바람이 시인의 볼을 건드린다. 그때 어디선가 구성진 노랫소리가 들렸다. 시인이 노랫소리 쪽을 보니 농부 한 명이 소를 몰고 논에 써래질을 하면서 홀로 노래를 크게 부르고 있다.

그 모습은 시인의 눈에 한 폭의 살아 있는 풍경화였다. 물기 머금은 대지를 잔잔히 펴져간 소리에 울컥 감격한다. 그 농민이 누가 들으라고 노래를 부른 게 아닐 테니. 써래질 하는 농민은 오직 고단함을 이기려 노래를 불렀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된, 그 아름다움으로 귀일한 거다. 무릎을 탁 치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다.

“노래는 부르는 가객뿐 아니라 자연과도 일치될 때 비로소 어우러지는 결정체다.” 시인은 그렇게 말한다. “일찍이 우리 민족들이 노래를 불렀던 곳은 대부분 일터의 현장이었다.”

“길쌈할 때, 혹은 쇠를 만지는 대장간에서, 혹은 논과 밭에서, 혹은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해양에서 고기를 잡을 때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곧 민요이기도 했고, 때로는 유행가의 한 가락으로 한껏 휘어지기도 했다.”

이동순은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 고운봉의 ‘명동 블루스’를 가장 좋아한다. 그는 수백 곡 중 언제 어디서 불러야 딱 떨어질지도 안다.

“결혼식 피로연 때 부르는 노래가 있고, 이민 가는 친구를 위해 부르는 노래가 있다. 졸업 축하연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고, 산행에서 내려와 부르는 노래가 있다. 실의에 잠겨 있거나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가 있고, 나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노래가 있다.” (책 352쪽,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노래’ 몇 토막)

“사물마다 거기에 맞는 적절한 노래가 있는 건가?”라고 시인은 묻는다. 이어 “노래란 것은 자연의 리듬, 생활의 리듬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것”이라며,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는 순간, 자신이 자연 속에서 매우 소중한 하나의 존재라는 실감을 갖게 되는 것”이라 자답한다.

이동순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일까? 앞서 말한 대로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와 고운봉의 ‘명동블루스’. 하지만 수많은 노래를 아는 시인도 1990년대 끝자락부터 불려진 가요는 가락도 가사도 알아먹기 힘들다 했다. 요즘 아이돌 노래는 더더욱 뭔 말인지도 모를 거다. 요즈음 가요가 우리네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동순이 작사, 작곡, 노래 세 조건을 가려 뽑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곡은?

△고복수 ‘사막의 한’ △황금심 ‘알뜰한 당신’ △진방남 ‘마상일기’ △백난아 ‘찔레꽃’ △현인 ‘비 나리는 고모령’ △장세영 ‘고향초’ △신세영 ‘전선야곡’ △한정무 ‘꿈에 본 내 고향’ △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 △백설희 ‘아메리카 차이나타운’과 ‘봄날은 간다’ △송민도 ‘나 하나의 사랑’ △안정애 ‘대전 블루스’ △도미 ‘비의 탱고’ △안다성 ‘에레나가 된 순희’ △윤일로 ‘항구의 사랑’ △최무룡 ‘외나무다리’ △현인 ‘세월이 가면’ △이미자 ‘삼백 리 한려수도’ △하수영 ‘아내의 노래’.

“사랑하고 아끼는 노래들을 지정된 숫자에 맞추기 위해 눈물 흘리며 베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몇 번이나 미련 때문에 주저하고 노래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고삐를 놓아 버리곤 했다.” “험한 세월의 혹독한 시달림과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서 이 낡은 고풍의 축음기는 내 방의 서가 한 켠에서 한결 고즈넉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는 축음기 특유의 그 잔잔하고 애틋하며 때론 눈물겹기까지한 소리를 들려준다.” (494쪽, ‘시간의 때가 묻은 것은 모두 소중한 것’ 몇 토막)

이동순의 저작 <번지 없는 주막>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 것 하나 제대로 못 가진 민초들의 울분과 한을 달래준다. 우리 가요사의 잃어버린 주소를 찾아주는 노래에 얽힌 참으로 구수한 에세이라고 할 것이다. 노래들이 한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고단함을 얼마나 포근하고 희망차게 감싸줬는지, 이 책은 조근조근 푼다.

한국일보 편집위원을 지낸 가요평론가 최규성의 멘트.
“영남대 국문과 교수 이동순은 괴짜다. 시인 백석을 발굴한 중견 시인인 그는 문단에서는 모르는 노래가 없는 가수이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유명한 악사이다, 유행가 노랫말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유일한 정통 국문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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