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는 죽었다. 이제부터 나를 ‘김영일’이라 불러다오”

김지하가 이동순에게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김지하 시인의 친필편지는 드물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한통 갖고 있다.

1986년 여름날 새벽, 정신과 병동에서 써 보냈다. 그가 정신적으로 매우 허약하던 시절의 글이라 이걸 공개하는 일에 많이 주저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는 공개해도 된다는 판단에서 오늘 이 글을 올린다.

김지하

김지하 시인은 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민주화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줄곧 추앙되고 활화산 같은 그의 시는 꾸준히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시인에 대한 독자들의 극진함은 평상을 넘어 거의 독보적 신화적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엄혹하던 시대도 지나고 옥중의 시인도 풀려났다. 이후로 세상은 급격히 ‘김지하’란 이름을 잊어갔다. 청년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더불어 시인 자신은 과거 자신이 짊어졌던 ‘김지하’란 막강한 이름이 몹시 불편하고 힘들었다. 너무 무겁고 커다란 모자를 쓴 것 같았다. 시인은 자신이 설정한 이름, ‘김지하’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과거시간의 구속과 제약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고정된 필명과 인식, 그 이름이 요구하는 가혹한 관점의 중량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음주, 일탈된 행동으로 숨어도 보았지만 건강만 상했을 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복되는 극악한 환경 속에서 자학과 파괴의 표현충동이 항시 들끓었다.

어딜 가나 ‘김지하’란 이름에 대한 요구와 기준은 굳게 설정되어 있었고 만약 그걸 충족하지 못하면 호된 비판이 뒤따랐다. 시인은 그러한 불편과 부담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뜬금없이 탈각충동과 힌두교식 화장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영일’이라는 본명은 때 묻지 않은 본향이며 순결한 세계였다.

시인은 그 본향으로 복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오랜 관습 속에 살아왔던지라 누군가가 지켜보아야 했다. 이를 확인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주변엔 아무도 보증인으로 나설 사람이 없었다.

‘카메라’와 ‘싸구려 잡지’란 통속적 도구를 돌연히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내 이름이 동원된 것도 그런 맥락의 연장이다. 낡고 때묻은 이름 ‘김지하’를 영결해야 했다.

그 이름을 영구 폐기할 장소로 선정된 곳은 청주, 거기에 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간지옥이 약속된 슬픈 여생’
이 짧은 구절에 그의 총체적 심경이 서려있다. 나보다 이웃을 더 사랑한다는 ‘애린(愛隣)’ 당시 그는 이 단어의 관념성이 주는 심리적 강박에 줄곧 빠져있었다.

그런 제목의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애린’을 방향의 중심으로 규정하고 복귀와 회복을 갈망한다. 그 덧없고 실속없는 지향과 충동 속에서 현재라는 시간성은 오로지 고통과 속박의 시간이다. 병실의 시간이며 불구의 환경일 뿐이다.

그런 열악한 터전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내면의 어떤 움직임을 감지한다. 그것을 자신은 ‘신명’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연결과정에서 문득 떠올린 청주장례식은 다만 충동적으로 설정한 가공의 의례일 뿐이다.

끊임없는 시련과 자해적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인은 원주기독병원 정신과 병동으로 들어갔다. 이 편지는 바로 그 무렵에 쓴 것이다. 심한 고통과 자괴(自愧)가 눈물자국처럼 보인다.

김지하라는 한 시인의 불행이자 시대의 불행이었다.

김지하가 이동순에게

東洵에게

지금 강원도 원주, 새벽 4시 정각,
병원 스테이션에서다.
이제부터 네게 띄우기 시작할
긴 편지의 시작 치고는 꽤나 어울린다.
간 때문에 입원했다더니 치료는 됐는지?
나 역시 간 때문이고 술 때문이고
미친 못남 때문이다.
난 본디 편지쓰기를 싫어했는데
간절히 편지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이렇게 쓰기 시작한다.
편한 마음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김지하가 이동순에게

내가 만약 밖에 있다면
<김지하 장례식>부터 치루고 싶다.
<김지하>라는 이름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다.
내겐 봄이 시작되는 건가?
허물을 벗게?
나뭇가지를 물어다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누워 제 자신을 불 지르고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는
사막의 불사조가 되려는 것인가?
여하튼 <김지하>라는 이름을 불 질러 버리고 싶다.
그래서 본디 어버이가 지어주신 내 이름,
<김영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혼자 해도 좋으나 네가 곁에 있어도 좋겠다.
몇 명 더 있어도 좋고,
싸구려 잡지, 카메라가 있어도 좋고—.
새로 태어난 <김영일>이 새로 살고 싶은 땅은
청주 어디쯤이다.
한 달 전 문득 술 취해 청주에 갔다가
원주 친구들에게 붙들려 돌아왔다.
나는 영영 청주에 못 가는 것일까?
東洵이를 만날 수는 없는 것,
<영일>에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건가?
가고 싶다. 하루에도 몇 백번 씩 가고 싶다.
그러나 나의 땅은 아닐 터.
나는 죽도록 떠돌 것이다.
나는 이미 지옥에 가도록 결정 지어진 사람.
무간지옥이 약속된 슬픈 여생.
만약 앞으로도 글을 발표한다면 <영일>로 할 것이다.
장례식이 필요하겠다.

김지하가 이동순에게

東洵.
애린은 바로 죽어 다시 태어나는 애린은 바로 나였다.
나는 땅 끝까지 밀려가 파도처럼 사라졌다.
여기 지금 네게 편지 쓰고 있는 건 <영일>이다.
떠돌이 <영일>로 나는 다시 떠난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무간지옥에 이를 때까지 울며 떠돌 것이다.
삶의 뜻을 물으며.
그 첫 목적지가 淸州인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우선 비밀로 해다오.
그곳에 사글세방을 얻어
명상과 시작(詩作)과 그림을.
떠나야 할 때가 오면 떠난다.
지금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은 병원이다.
원주가 아니라 병원이다. 모두 낯설다.
슬픈 하루하루 외로운 시간 시간이다.
시를 못 써도 좋다.
그러나 스스로 죽을 수는 없는 건
아이들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책임이다.
죽지는 않겠다. 데려갈 때까지
아아, 내가 지금 네 곁에 있다면
수많은 황금강물의 모래와
숱한 푸른 비단실의 시들을 구술할 텐데—
언젠가는 퇴원할 것이고 언젠가는 가겠다.
그러나 그때 가는 건 <김영일>이다.
손이 또 떨린다.
지금이 4시 반, 다섯 시까지만 쓰겠다.
네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다.
네 주위에 틀림없이 ‘활동하는 빈 눈’이 있어
나를 그 무(無)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
나는 반드시 갈 것이다.
나를 끌어당기는 내 속의 활동적인 무(無),
그 신명에게로 내가.

다시 말한다.
<김지하>는 죽었다.
이제부터 나를 <김영일>이라 불러다오.
언제일지 모르지만 장례식은 청주에서 하자.
조사(弔辭)는 네가 써다오.
또 새벽에 쓰마. 허나 놀라지 마라.
예상되었던 것이니까. 안녕.

1986년 7월 5일
새벽 4시 35분

영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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