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부친의 곤고했던 일본생활을 떠올리며, 시인은···.

이동순 시인의 부친(이현경) 신분증 

아버지는 1940년 4월에 일본으로 가셨다. 그때 나이는 33세, 아내와 어린 자녀를 고향집에 둔 채 극도의 가난 속에 일자리를 찾아 가셨다.

목적지는 일본의 고쿠라(小倉), 발전소 건설현장의 작업 인부였다. 요즘 한국으로 치면 베트남,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처지였다.

하는 일은 시멘트를 만지는 미장(美粧),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리라. 당시 한국인이 일본에 가게 되면 무조건 협화회(協和會)란 조직에 가입해야 했다. 이 협화회는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전쟁치하의 조선인 통제기구였다.

협화회 회원 준수사항이 적힌 수첩

협화회 수첩의 구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검정색 종이로 된 표지를 열면 협화회 회원증을 소지한 사람이 지켜야 할 각종 주의사항이 빼곡히 적혀있다. 아버지의 신상명세 끝에는 일본인 고토(後藤)의 확인도장이 찍혔다.

이 신분증은 항시 지니고 다녀야 하며 거주이동이 있을 경우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이를 보더라도 재일본 조선인의 현황 파악과 감시가 협화회 조직의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4월 15일에 취업해서 발전소 건설현장 작업 인부로 일하셨다. 그때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어머니는 극빈 속에 신발조차 없이 눈길을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당신 낭군을 취업노동자로 일본으로 보내고 자녀들과 막막한 상태로 버티었으리라. 협화회 회원증 뒷면에는 일본의 각종 축제일과 ‘황국신민 서사’가 보인다.

이동순 부친이 소지했던 수첩에 인쇄된 일본 축제일과 황국신민 서사 

일터에서는 하루 일과 시작 전에 꼭 이 ‘황국신민 서사’를 소리내어 외웠다. “나는 황국의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은혜를 갚는다.”

열등한 자기신분에 대한 자각의 유도였으리라. 당시 일본의 축제란 것이 눈길을 끈다. 1월의 사방배는 천지신명에 대한 새해인사이다. 2월은 기원절이 보인다. 황령제란 것이 있는데 3월과 9월 두 차례가 있다. 4월은 신화 속의 왕 神武 기념제가 있고, 5월은 일본왕 쇼와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이 있다. 10월은 일종의 추수감사제인 新嘗祭가 있고 11월은 메이지 왕의 출생기념일, 12월은 다이쇼 왕의 출생기념일이 있다. 3월과 5월에는 육군, 해군기념일이 따로 있고 4월과 10월에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례가 있다.

군국주의체제 시절이라 모든 행사와 의례가 일본 왕이나 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런 날이면 식민지에서 온 노동자들에게도 담배와 술이 따로 지급이 되고 때로는 휴식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조그만 협회회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매일 노동현장으로 다니셨을 아버지의 젊었던 30대 청년시절을 상상해본다. 이렇게 5년을 머물다가 귀향하셨으니 적지않은 세월을 일본에서 힘든 노동자 생활로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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