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두석 형, 내년 한국현대대표시선Ⅲ 30돌 기념해 만납시다, 민영·최원식 시인도 함께”

한국현대대표시선3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1992년 11월, 창비 회의실에서는 <한국현대대표시선 시리즈 3>을 발간하는 편집자 모임이 있었다. 민영, 최원식, 이동순, 최두석 등 4인이 편자로 모인 그날의 회동 인물들이다.

1970년대 이후 대표시작품을 엄격한 기준 속에서 추천하고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정하는 모꼬지였다. 그 편집자 중 가장 후배였던 최두석 시인은 1956년 전남 담양 출생이다.

1980년 <심상>지를 통해 작품 ‘김통정’을 발표한 뒤 <대꽃> <임진강>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꽃에게 길을 묻는다> <투구꽃> 등의 시집을 펴냈다.

차분하고도 엄정한 시각으로 일그러지고 부조리한 현실의 면모를 섬세한 상상력으로 이끌어낸 방법이 돋보인다. 특히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된 시 ‘성에꽃’은 엄혹한 시대의 빛깔을 잘 담아낸 시작품으로 평가된다.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깁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최두석의 시 ‘성에꽃’ 전문

 

최두석 시인

이 작품은 한겨울 시내버스에 같이 탄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버스 유리창에 달라붙어 빚어내는 성에꽃을 기막히게 포착해내고 있다.

시인의 시각, 시인의 책무, 시인에게 맡겨진 시대적 역할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작품이다. 최두석은 평론집 <시와 리얼리즘>을 통해서 한국현대시의 광채나는 리얼리즘적 성과도 눈여겨 정리 해설해내고 있는데 이용악의 시 ‘낡은 집’과 백석의 시 ‘여승’을 비교하며 이야기시로서의 성격을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의 해설 이후 백석의 시 ‘여승’은 한층 시대사적 의미를 담아낸 탁월한 시로 주목과 각광을 받으며 재조명되었다.

2009년 이후로는 시집 발간이 뜸해져 아쉽다. 서울사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강릉대, 한신대 문창과 교수 등을 거쳤는데 최근에 정년퇴임을 했을 듯하다.

자주 만난 후배는 아니었지만 모임에서 만나면 늘 활짝 웃으며 다가와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던 그의 겸손하고 깍듯한 예절의 풍모가 떠오른다. 내가 보낸 시집 <가시연꽃>을 받고 최두석 시인이 보내온 엽서를 소개한다.

최두석이 이동순에게

이동순 선생님께

보내주신
시집 “가시연꽃” 잘 받아 읽었습니다.
후기에 적은
‘삶이 시와 더불어 조용히 열려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집이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시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는 저에게
선생님의 정진은
좋은 모범이 될 듯합니다.

1999년 11월 14일

최두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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