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시인의 ‘아버지 회억’···”아련한 당신의 축귀문 독송 들리는듯”

이동순 시인 부친의 축귀문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어린 날 새벽이면 아버지가 외시는 ‘축귀문(逐鬼文)’ 독경이 들렸다. 잠결에 듣는 아버지 음성은 파도소리처럼 가깝게 다가왔다가 아스라히 멀어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께 늘 읽으시는 글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집안을 침노하려는 나쁜 기운이 공중에는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절대 범접하지 못하도록 호되게 꾸중하는 내용, 결코 다가와서는 안되는 논리 따위를 조목조목 적어서 호통치는 그런 내용이 담겨있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귀신 쫓는 경문인데 이를 외면 집안에 들어온 귀신이나 밖에서 들어오려고 기회를 엿보는 귀신들이 경문을 듣고 놀라 달아난다고 했다.

“부 귀소이유차 귀숭자는 만만부당하니 고천 소멸이 가야라 석자구여 난덕지후에 내명 남정중하야 사천이 속신하고 화적려로 사지이 속민하야 사무상 침독하시니 부포백 마사옥석과 금목수토 등사는 사지자지 소관이요 행운세우와 위뢰위무와 내풍내양 등속은 사천자지 소관야라”

워낙 매일 새벽 잠결에 듣던 독송이라 문장을 안보고도 따라서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늘 근심과 걱정이 들어 있었고 그것이 가정에 어떤 위해를 끼칠 수가 있다는 그런 염려를 크게 하셨던 것임에 틀림 없다. 나이 마흔 셋에 나를 낳으시고 이듬해 아내를 병으로 잃어버리셨다.

1959년 대구 서내동 시절 이동순과 부친 이현경

두 아들을 질병으로 먼저 떠나보냈으니 아버지 가슴은 온통 맑은 날이 없었으리라. 이 ‘축귀송문’은 아버지의 큰 형님, 그러니까 백부님께 받은 것이라고 한다. 백부께서는 유난히 풍수지리, 도참, 무속 이런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늘 명당과 길지를 찾아 돌아다니셨다. 형제들이 아프거나 집안에 궂은 일이 생길 때 그것을 귀신의 장난이나 시샘으로 여겨 반드시 ‘축귀문’을 외우도록 했다고 한다.

젊어서 백부께 받아둔 ‘축귀문’을 평생 지니고 무슨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고통스런 일들이 앞을 가로막을 때 아버지의 ‘축귀문’ 읽으시는 소리는 더욱 커지고 의존도가 높아졌던 것 같다. 얼마나 마음 기댈 곳이 없었으면 이런 ‘축귀문’ 외기에 의탁하셨던 것일까? 이 ‘축귀문’의 유래나 기원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짐작컨대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던 농민군들이 이런 경전 독법에 즐겨 의탁했었다. 심지어는 주문을 적은 종이를 태워 그 재를 물과 함께 삼키고 효과를 기원하는 그런 방법도 썼다고 한다.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의 현대적 병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무리죽음으로 쓰러질 때 이 주문을 외고 그 태운 재를 복용한 뒤 출전했던 농민군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아버지가 새벽마다 ‘축귀문’을 외던 것도 우금치전투의 농민군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그 막막함, 그 아득함, 그 황량함, 실오라기에도 기대보려 했던 아버지의 내적 갈망을 곰곰이 되짚어보는 새벽이다. 어린 날 잠결에 아련히 듣던 아버지의 ‘축귀문’ 독송이 들리는 듯하다. 그 소리가 들리면 이불을 끌어당겨 일부러 머리 위로 덮었는데 그러면 더욱 선명하게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 국한문 혼용 ‘축귀문’의 마지막 대목은 언제나 “급급 여율령 사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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