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시형께···1980년 5월 16일 한광구 드림”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공적인 회합이나 만남에서 활짝 웃으며 먼저 다가와 호감을 보이는 그런 분이 꼭 있다. 어떤 계기가 있는 건 결코 아니고 본인 자신의 싹싹한 성품에다 늘 사교적 친근감으로 남을 대하는 밝고 환한 그의 기질 때문이리라 여긴다.
한광구(1944~ ) 시인이 바로 그런 분이다. 잘 웃고 겸손하고 온유하며 언제나 자신을 낮추는 매너가 인상적이었다. 1944년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나보다 한 해 뒤인 1974년에 <심상>지를 통해 시 ‘혹’, ‘0.4’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시집 <이 땅에 비 오는 날은>, <상처를 위하여>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했고, <물의 눈>이란 제목의 소설집도 발간했다.
박목월 시인의 시세계를 분석한 평론집도 펴냈고 추계예술대 문창과 교수로 활동했다. 처음 만나던 1970년대 무렵엔 기업 홍보실에 있다던 기억이 남아 있다. 삶을 관조하는 담담한 시선과 표현으로 일관된 시적 작업을 해왔다.
한광구 시인이 보내온 편지의 날짜가 이채롭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 시기 광주는 불안한 침묵으로 가득했으리라. 마침내 5.18 비극이 발생하고 모든 신문들이 국보위의 보도통제 속에 시위군중을 폭동과 폭도로 몰아가던 그 참담한 시절의 광적인 신문기사들이 떠오른다.
내가 근무하던 안동의 작은 전문대학도 학교정문을 군용트럭이 가로막고 집총한 군인이 차디찬 표정으로 출입자를 단속하던 그 퇴행적 장면이 선명히 떠오른다.
5.18을 일으켜 정권을 도둑질한 주범은 한 마디 사과나 반성 없이 죽었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묵묵히 돌아가고 있다.
한광구 시인이 쓴 편지 날짜에서 문득 당시의 슬픈 실루엣을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광구 시인도 어느 틈에 팔순 나이에 이르는구나.
李東洵 詩兄께
노총각 신세를 면하시고
신혼의 단맛도 이제는 익숙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던 李兄에게서 첫 시집인
“개밥풀”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간 <자유시>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잡지를 통하여 대해보던 李兄의 시를 이렇게
한 권의 詩集을 통하여 읽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쁜 마음입니다.
특히 ‘마왕(魔王)의 잠’에서부터
兄의 詩를 읽어오던 저에게는
兄의 詩集에 대한 무한한 경탄을 해오던 터였고
요즘 兄이 경도하시는 民衆詩의
면모를 상당히 관심 있게 읽고 있습니다.
항상 부드럽고 다감하시면서
안으로 끈끈하게 배어나오는 저력이라든가
또 날카로운 兄의 비판은
저에게 무엇보다 큰 자극입니다.
계절이 무르익은 봄은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이 때에 마음으로 쓸쓸해하고 있던 이 때에
兄의 詩集은 제게 마음의 큰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마음이 쓸쓸할 때
꺼내서 두고 두고 읽겠습니다.
특히 대구의 詩人들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격의없는 우정과
詩를 갈구하는 마음들의 분위기가 그립습니다.
그럼 뵈올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詩集 고맙습니다.
1980년 5월 16일
韓 光 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