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스산한 거리에서 김규동의 ‘송년’을 읽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김규동(1925~2011) 시인께서는 1991년, 시선집 <길은 멀어도>(미래사)를 발간하셨는데, 그간 시집들에서 가려뽑은 것이었다. 그때도 해설을 나에게 요청하셨다.

모더니즘 방법으로 시창작의 길을 열어나갔지만 단조로운 기교, 기하학적 구도를 극복하고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결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시를 써서 놀라운 감동과 신선함을 성취하신 경로를 두루 탐색하고 정리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해설의 관점이 몹시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나중에 <김규동시전집> 해설의 필자로까지 직접 지명해주셨다. <길은 멀어도> 시집을 따로 보내주시며 이 정성스런 편지를 적어 보내셨다.

한지를 반듯하게 오려서 붓으로 마치 한 편의 시를 쓰듯 정갈하고 단정한 필체로 편지를 쓰셨다. 이 한 해도 서서히 저물어간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동의 흐름이었다. 바람 부는 세밑의 스산한 거리를 걸으며 선생님의 시선집에 들어있는 ‘송년’(送年)이란 시 한 편을 함께 읽어본다.

送 年
              김 규 동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일까 가고 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 같이
믿어 달라는 하소연과 같이
짖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 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한 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김규동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이 동 순 선생

제례(除禮)하옵고,
이번 졸작 시집에 글 써주신 것을
무한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시보담 이 선생 평문이 더 훌륭하니
감격할 도리 밖에 없고
공부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고마운 말씀 글월로 몇 자 적습니다.
감사하오며,
이 교수의 건필과 댁내 행운을 기원하나이다.
“길은 멀어도” 한 권 따로 부칩니다.
내내

1991년 10월 27일

김 규 동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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