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의 손편지] “워낙 근면하시고 자상한 이동순 시인”

김규동 시인의 손편지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사람이 친교(親交)를 가진다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경로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서로 직접 대면해서 정을 나누고 쌓아가며 이루는 친교가 있고, 다른 하나는 만남이 없더라도 서로의 작품이나 논문, 직감 등으로 친교와 신뢰를 쌓아가는 경로가 있다.

둘 중 가장 미더운 것은 물론 직접 만남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서로 살피며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런 친교는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두번째 경로의 친교는 직접 대면이 아니기 때문에 이후 인간적 실망이나 신뢰의 붕괴로 말미암아 쉽게 허물어지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위험을 수반하는 방식이다.

직관력이나 통찰력이 대단한 안목으로 맺어지는 것이라 한번 연결이 되면 특별한 인연으로 오래 이어질 수도 있다. 내가 왜 이런 언설을 글머리에서 길게 늘어놓는가 하면 김규동(金奎東, 1925~2011) 시인과 나의 친교를 설명하려 하기 위함이다.

나는 김 시인과 자주 만남을 가졌거나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나누거나 한 적이 전혀 없다. 단지 김규동 시인께서 내 작품과 산문 등을 보고 극히 마음에 들어 하며 신뢰와 사랑을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김규동 시인의 시집 해설을 맡은 적이 있고, 선생님께서 만년에 노환으로 누워계실 때 창비의 제의로 <김규동시전집>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해설 집필자로 나를 지명해주신 영광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문단에는 쟁쟁한 비평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나를 지명해주셨다.

세상에 그 누구인들 자기를 좋아하고 호감을 갖는 사람에게 냉대할 경우가 있으리오? 김규동 시인은 틈만 나면 월평(月評)에서 내 시를 칭찬해주셨고, 내가 책을 발간해서 보내드리면 꼭 뜨거운 칭찬과 긍정의 표현을 쓰시며 분에 넘치는 격려를 보내주셨다.

가만히 돌이켜 보노라면 내가 어느 특정 후배에게 이토록 뜨거운 격려와 지지를 보낸 경우가 있었던가?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몇 사람이 떠오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사랑했던 후배들은 대개 먼저 세상을 떠났거나 몹쓸 중환으로 현실에서 괴리된 삶을 살고 있다. 그것도 내 불운이다.

김규동 시인을 알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으리라. 고서점에서 찾아낸 당신의 시집 때문이다. <나비와 광장>이라는 하드커버의 시집을 대구시청 옆 골목 고서점에서 구입하고 집에 돌아와서 읽었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거기엔 6.25전쟁의 참혹한 상처의 빛깔이 얼룩져 있었고, 떠나온 북녘 고향집과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그렁그렁하였다.

그런데 시적 문장이 범속하거나 평범하지 않고 멋스러움을 풍기며 때로는 난삽하기조차 했었다. 나중에 문학사를 공부하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게 모더니즘 영향 때문에 형성된 문체란 사실을 알았다. 절대 저급한 로맨티스트들처럼 허투루 그냥 발화하지 않고 산뜻하거나 경쾌한 모던 감각이 살아있는 문체를 모더니스트들이 구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김규동 시인이 소년시절, 함북 경성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참으로 존경했던 시인이 당대 최고의 모더니스트 김기림(金起林, 1908~?) 선생이었음을 알았다. 김기림은 경성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냈고, 이때 제자 김규동의 시인적 재능을 발견하며 칭찬과 격려를 쏟아주셨던가 보다.

김기림 선생은 그 후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옮겨서 기자, 교수 등을 하면서 시인의 삶을 살아갔다. 제자 김규동은 해방 직후 그 혼돈의 시기에서 스승 김기림 선생을 못내 그리워하며 가르침을 받고자 삼팔선을 넘어 잠시 서울로 다니러 왔다. 그게 고향과의 완전하고도 슬픈 이별이 되었다. 언덕 위 고향집 사립문 앞에서 어머니가 잘 다녀오라며 아들을 향해 손을 흔들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김기림 시인은 분단시기에 오히려 북으로 가버리고 남쪽에는 그 누구도 알음알이가 없는 절해고도와 같은 상태에서 고독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북에서 내려온 문학인들, 이를테면 나를 시인으로 뽑아주신 평양 출신의 박남수(朴南秀, 1918~1994) 시인, 시전문지 <현대시학>을 창간하고 운영했던 전봉건(全鳳健, 1928~1988) 시인 등도 기본적 표정은 쓸쓸함이었다.

남녘 문인들은 왁자지껄 어울려 다니며 정신적 여유를 즐기지만 월남한 북녘출신 문인들은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주변부를 서성이며 쓰디쓴 고독과 소외를 씹을 뿐이었다.

박남수 시인은 결국 미국으로 이민 길을 떠나 뉴욕의 밤거리에서 과일노점상을 하시기도 했고, 전봉건 시인은 영세한 잡지사 사무실을 혼자 지키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 김규동 시인도 늘 혼자 시를 쓰고, 혼자 길을 걷고, 혼자 고향집 어머니를 생각하고, 만년에는 자부(子婦)의 도움으로 목판에 시를 새기는 시각(詩刻)에 골몰하시며 적적하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셨다.

지금도 선연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민족서사시 ‘홍범도’를 쓰느라 청주 상당산성 마을에 들어가 집필실을 꾸며놓고 작품쓰기에 몰입할 때의 일이다. 그것만 쓰는 것이 힘들어 이따금 마을 내부와 주변을 한 바퀴 휘돌아 둘러보며 오래된 마을의 정경을 눈여겨보고 주로 농기구와 관련된 시적 성찰을 시작품으로 엮어내던 시절이 있었다.

‘청이네 집’, ‘남주네 집’, ‘김 노인네 흙집’ ‘물봉선’ 등이 그 사례가 되는 작품들인데 나는 이를 백석 시의 화법으로 풀어내어 발표하곤 했다. 그런데 김규동 시인께서 당시 내 작품을 보시고 <한국문학>이던가, <문학사상> <월간문학>이던가, 선생님께서 맡고 있던 몇 군데 월평에서 크게 칭찬을 해주신 기억이 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문단의 원로시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나는 사뭇 우쭐거리며 마음 든든하며 마치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난 뒤 서울에서 이따금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문학인 항의집회나 시위가 있어서 참가할 때면 그 자리에 꼭 김규동 시인이 계셨다.

나는 멀리서 선생님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달려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절을 드리었다. 그럴 때면 깡마른 체구의 김규동 시인께서는 몸소 일어나 활짝 웃으시며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등을 두드리시며 잔잔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격려를 해주셨다. 어쩌다 시집이나 여행기, 에세이 등을 발간해서 보내드리면 분외(分外)의 칭찬을 편지로 써 보내주셨다.

나에게는 문학의 여러 스승이 있는데 대학시절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이 첫 은사요, 동아일보신춘문예에서 내 시를 뽑아주신 박남수 시인이 두 번째 은사요, 내 작품을 일일이 칭찬해주시며 의기를 북돋워주신 김규동 시인이 그 세 번째 은사이다. 네 번째 은사는 늘 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시며 후배의 진정한 발전을 암암리에 지원해주시던 비평가 염무웅(廉武雄, 1941~ ) 선생이다. 오늘의 내가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네 분 은사님들의 가호와 배려 덕분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1990년대 이후로 분단시대 매몰문학인의 자료복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고 그 전집 시리즈를 발간하던 시절의 추억이다. 장차 통일에 대비하는 문학연구자로서의 진정한 준비 작업이란 확신을 갖고 시작한 활동이다. 1987년 <백석시전집> 발간이 발단이자 기폭제가 되어서 이후 그러한 작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월북은 아니지만 카프문학인으로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던 권환(權煥, 1903~1954) 시인의 전집을 발간했다. 이후 조명암(趙鳴岩, 1913~1993), 이찬(李燦, 1910~1974), 조벽암(趙碧岩, 1908~1985), 박세영(朴世永, 1902~1989) 등의 시전집을 소명출판에서 박성모 대표의 지원으로 잇따라 발간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격려해주는 이는 별반 없었다. 그때 내가 <조벽암시전집>을 발간하고 김규동 선생께 보내드렸을 때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는 사뭇 감동으로 철철 넘쳐흐른다. 오랜 만에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꺼내 읽노라니 눈가에 습기가 흥건히 맺혀온다. 선생님께 받은 편지는 도합 십여 통이 넘지만 오늘은 이 편지를 먼저 소개한다.

김규동 시인의 손편지


이동순, 김석영 교수 궤하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를 빕니다.

두 분께서 헌신적으로 해내신 큰 업적을 우선 축하드립니다. <조벽암시전집>은 너무나 빈틈없는 완벽한 책입니다. 일독하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소생은 벽암 시를 다는 읽지 못했어도 일정 때와 북한, 그리고 남으로 나온 뒤에 틈틈이 읽었습니다만 이렇게 완전한 책은 그야말로 처음입니다. 해방공간기의 작품, 북에서 발표된 시까지 망라되어 있어 앞으로 조 시인 연구를 할 후진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나이다.

이 교수께서는 워낙 근면하시고 자상한 시인이시니 이런 일이 다 이뤄진 것이라 믿어집니다. 김 교수께도 격려와 감사 인사 올립니다. 앞으로 이동순님을 도와 더욱 많은 일을 해내시기를 비나이다. 이동순님은 큰 시인이며 석학이십니다.

이번의 이 작업 역시 이러한 환경과 만난을 무릅쓴 노력의 결과이겠습니다. 다시금 치하와 격려와 감사의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이 방대한 전집이 우리 가난한 문학계에 큰 자극이 되고 또 우러러 보는 푯말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나이다.

우선 글월로 축하의 인사 올리나이다. 두 분의 건필과 댁내 만복을 기원합니다.

2004. 1. 28

김 규 동 배

김규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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