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 옛 편지엔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이 묻어 있건만

최동호 평론가가 이동순 시인에게 1987년 쓴 편지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예전에 정을 나누던 이가 아주 관계를 단절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 된 까닭을 전혀 모른다. 워낙 자기확장적인 삶을 사는 분이라 그의 그물망에서 내가 전혀 배제된 것이리라. 왜냐하면 필요성이 사라졌으므로.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무렵, 아직 그가 등단하기 전인 20대 중반이다. 그의 학부 동문들과 우연히 어울린 풍류모임인데 서울 수유리 골짜기 도성암이란 암자 옆 계곡물이 콸콸 흐르는 너럭바위였다. 조성준, 유진채, 강승규 등등 대여섯이 모였는데 그들은 학부시절 같은 서클 친구였다.

나는 친구의 친구로서 그날 뜻밖의 권유를 받아 합석하게 되었다. 삶은 돼지고기 수육과 빈대떡, 막걸리, 소주, 맥주 등이 준비되었다. 둘러앉아 방담을 나누며 호쾌하게 즐기는 시간, 노래도 돌아가며 한 차례씩 불렀다.

소나기 거쳐간 직후의 여름밤이라 서늘한 계곡 물소리가 워낙 크게 들렸다. 말소리의 톤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는 나에게 어쩌면 그리도 이른 나이에 신춘문예를 통과했느냐며 귀에 대고 마냥 큰 소리로 찬탄을 보내었다.

폭포 물소리를 들으며 주고받은 대화. 그후 그는 신춘문예 평론으로 데뷔했고 여러 대학을 거쳐 자신의 모교에서 정년했다. 제자들도 군집으로 배출했다.

오죽하면 ‘아무개 사단’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그의 장인이 1930년대 시인 김달진이다. 장인 이름을 붙인 문학상도 만들어 관리하고 문학제도 열고 문학지와 출판사도 운영하고 시인으로서 시집도 여러 권 발간하고 문단에서의 막강한 권력자란 평까지 듣는다.

그간 아주 드물게 마주치거나 했지만 옛 도성암 시절의 추억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도 나를, 나도 그를 찾지 않고 찾을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인맥이 서로 달라져버린 것이다.

그의 출판사에서 <백석전집>을 발간할 때 공동편자로 영광의 초대를 받아 1권의 시부에서 대표 편집으로 내 이름이 들어갔다. 내가 가진 미공개 시작품도 제공하고 새로움의 가치를 보태며 정성스런 해설까지 썼다.

그런데 이듬해 개정판을 낼 때 아무런 상의도 없이 내 이름과 해설을 빼버렸다. 그 자리에 자기 이름과 해설을 올렸다. 도무지 무례하고 있을 수 없는 불쾌한 일이지만 그냥 참고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옛 편지를 찾아서 보던 중에 그가 보낸 아름답고 따뜻한 서간이 눈에 띠기에 옛 추억을 되새기며 올려본다. 한때 그는 내 첫 시집 <개밥풀>로 한 편의 독립된 긴 글의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염량(炎凉)이 아주 달라졌다. 만남의 소중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만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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