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편지의 느낌은 뭐랄까···” 소설가 김성동이 시인 이동순에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명예동해시민] 오래된 편지를 읽는 느낌은 뭐랄까, 박제된 시간의 내부를 돌아보는 야릇한 실감이 든다.

지금은 모두 과거로 떠난 것들이지만 그 시절의 따뜻한 우정, 정겨운 포용, 아름다운 긍정이 이토록 눈물겹게 되살아날 줄이야.

‘정각’(正覺)은 작가 김성동의 승려시절 법명이다. 환속한 뒤로는 ‘석남거사’(石南居士)란 자호를 쓰기도 했다. 김성동은 해방 직후 좌익활동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아버지의 여파로 어머니도 횡액을 겪게 되고, 온 집안이 환난과 풍비박산으로 거덜나는 애달픈 참화를 겪게 된다.

김성동 작가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던 어린 소년 김성동은 어머니가 사찰에 맡겨 일찍부터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거기서 10대 후반까지 지내며 충남 보령고,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학교 공부보다는 불경, 독경을 통해 삶과 존재의 인식, 우주에 대한 통찰까지 광범위하고 깊이를 가진 깨달음을 얻게 됐다. 능숙한 한문 읽기, 서예,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등은 동년배 세대 중 가장 우뚝하다.

그의 대표작 <만다라>, <국수>(國手), <오막살이 집 한 채>, <피안의 새> 등은 모두 승려시절 체험들의 투영이 짙게 배어 있다.

그와는 ‘명이(明夷) 독서회’를 통해 더욱 가까워졌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한 정을 느끼며 왕래도 하고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필자가 1984년, 장시 ‘풍등사설’(風燈辭說)을 <창비 무크시집>에 발표했을 때 그걸 읽고 독후감을 써서 보내주었다. 구구절절 우정과 기대와 신뢰가 눅진하게 묻어나는 필치다.

존경하는 친구의 편지를 오랜만에 읽어본다. 그 편지 원문을 그대로 읽어 내려가기엔 불편이 있을 듯해서 본문 전체를 옮겨본다. 다정한 친구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한다.

東洵 仁兄

<원주 테제> 보냅니다.
결국 세계와 나(詩)를 대립하는 절대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생명의 고리로써 선택된 절대의 개념으로 파악하자는 동양정신으로의 귀일(歸一)을 얘기한 것으로 읽었는데…… 그러나 언어와 문자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지?

“풍등사설(風燈辭說)” 재미있게 읽었으오. 슬픈 노래임에 분명하건만 읽는 자에게 기묘한 신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결국 노래하는 자가 그 슬픔의 근저(根底)를 꿰뚫어봄으로써 어떤 아름다움, 그것이 이른바 시에서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한 끝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능청스러운 형용의 모습이랄까, 仁兄으로서야 한 시도이겠으나 그 가락, 그 목청을 더욱 확대 강화시켜 민족사를 한 줄에 꿰는 대하서사시로 성큼 나아가시어 가없는 공감 바다에서 몸을 떨고 있는 이 시대의 중생들에게 長明燈으로 길이 빛나소서. 餘不備禮.

1984.2.6.
正覺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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