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귀향’과 ‘자유시 참변’···홍범도 장군 “78년만에 고국 땅 흙냄새 맡아보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담긴 관과 영정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8월 18일 마침내 홍범도 장군의 귀향이 이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유해 안장식 추념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귀환은 어려운 시기,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위기극복에 함께하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선조들의 고난을 뒤돌아보며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나라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며 “그해 치러진 ‘독립전쟁 1회전’ ‘독립전쟁 첫 승리’라고 불렸던 봉오동전투와 독립전쟁 최대의 승리,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던 독립전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이 오늘 마침내 고국산천에 몸을 누이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든 ‘승리와 희망의 역사’”라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과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수십만 동포들이 승리의 주역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장군의 불굴의 무장투쟁은 강한 국방력의 뿌리가 되었다”면서 “1800톤급 잠수함 ‘홍범도함’은 긍지와 함께 필승의 신념으로 동해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대하서사시 ‘홍범도’를 지은 이동순 시인이 고국으로 돌아온 장군의 마음을 표한한 시 한 구절이다.

“나 홍범도, 고국 강토에 돌아왔네/ 저 멀리 바람 찬 중앙아시아 빈들에 잠든 지 78년 만일세/ 내 고국 땅에 두 무릎 꿇고 구부려 흙냄새 맡아보네/ 가만히 입술도 대어보네/ 고향 흙에 뜨거운 눈물 뚝뚝 떨어지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모셔져 있던 홍범도 장군 묘. 카자흐 정부는 1990년대 위인의 이름으로 거리 명을 짓는 정책을 추진해 그곳 고려인들은 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선생을 추천해 1994년과 1997년 그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각각 생겼다. <사진 연합뉴스>

조국 광복에 평생을 바친 홍범도 장군(1868~1943)이 순국 78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겼다. 장군의 귀환을 계기로 우리 독립군 역사 가운데 ‘자유시 참변’을 잠깐 살펴보면 일본군이 아닌 소련군의 앞잡이인 같은 민족 공산당에 의해서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청산리전투 영웅들과 40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이 몰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독립의 주력핵심이 사라지고 일제 강점기 내내 회복불능의 상태가 됐다.

당시 독립군 투쟁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남겼었다. 외세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일본 정예군과 맞붙어 두 번씩이나 대첩(大捷)을 이룬 역사는 다른 식민지 국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빛나는 성과다.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홍범도 장군은 간도국민회 산하 대한독립군 700명을 지휘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당시 러시아는 혁명 내전 중에 있었고, 일본군이 러시아 공산혁명의 반대파인 백군(白軍)을 도와 시베리아까지 출병해 있었다. 때문에 러시아 땅으로 넘어온 한국독립군은 부득이 레닌 정부군인 백군의 혁명투쟁에 가담해 그들로부터 군량, 무기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참변 당시 독립군. 당시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군인 적군(赤軍)은 혁명이 어느 정도 진척돼 한인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되자.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은 적군과 독립군을 이간시키기 시작했다. 1920년 일본은 북경에서 러시아와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 어업조약을 맺으면서 그 대가로 러시아 땅에서 한인 독립군의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과 러시아 주재 문창범과 오하묵이 이끄는 독립군이 마침내 제야강 자유시(현 스보보드니) 주둔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해제령을 내렸다. 대한독립군으로서는 소련군과의 협력관계나 그들의 혁명투쟁을 위해 흘린 피의 대가로 보더라도 무장해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마땅히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라는 ‘대한독립군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전사자 숫자는 자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하지 않지만, 40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이 그 뒤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역사학자들은 이 4000명 모두가 몰살당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한인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역시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 극장 수위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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