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직후 대구, 아스라한 유년의 또렷한 기억

 1922년과 1935년 대구지역 담배 제조 판매량 통계를 볼 수 있다. 대구전매지국이 발행한 엽서로 잎담배 수납현황, 연초 제조량, 연초 판매량을 시대별로 비교해놓은 그래프다. 

1953년,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대구로 터전을 옮기셨다. 아내와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고향마을이 꼴도 보기 싫고 지긋지긋했으리라. 그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크지 않은 농토를 경작하던 중이었으니 전쟁 직후 이농민의 도시이동에 해당되리라.

대구로 거처를 옮긴 직후에는 북구 태평로 종합운동장 옆에 사글세를 살았다. 내 나이 불과 세 살 무렵인데 놀라운 것은 그때 집안 풍경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어두컴컴한 단칸방 밖엔 쪽마루가 있고 그 마루 아래로는 군불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방 밖은 다소 넓은 마당이 보였는데 마당 위는 지붕으로 덮인 작업공간이었다. 화물차의 녹슨 휠이 마당구석에 쌓여있었고 각종 쓰레기와 폐타이어가 가득하였으니 자동차 수리점을 하던 집이었으리라.

나는 그 마루에 앉아서 밖에 나가자고 울었다. 희한하게도 그 시절의 실루엣이 재생되는 것이다. 거기서 몇 달 살다가 옮긴 곳이 중구 수창동 전매료라는 주거공간이다. 마치 난민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아주 낡은 일본식 목조 2층 건물인데 나무계단을 오를 땐 끼익 끽 기분이 이상해지는 불쾌한 소리를 내었다. 이 전매료는 전매청 가족만 입주할 수 있는 곳이다.

이동순 시인의 유년시절 살던 집

대구로 오신 아버지가 잡은 일터는 대구지방전매청 엽연초 보관창고의 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였다. 이어서 형도 전매청 서무계 직원이 되었고 큰 누나는 권련제조공장의 담배말이 여공이 되었으니 완전하고도 손색없는 전매가족이었고 그 덕분에 전매료 입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전매료에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종이배접기 등 여러 놀이를 하느라 날 저무는 줄 몰랐다. 그 건물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낡고 귀신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 이채롭다.

전매청 건물은 문화예술발전소로 바뀌었는데 전매료 건물은 넋나간 꼴로 우두커니 서 있다. 진작 허물어졌을 터인데 도심 한 가운데 흉물스런 꼴로 서 있는 그 을씨년스런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전매가족의 유물을 하나 스크랩에서 보았다. 일제 때 대구전매지국이 발행한 엽서인데 흥미로운 것은 잎담배 수납현황, 연초 제조량, 연초 판매량을 시대별로 비교해놓은 그라프이다. 1922년에는 수납도 제조도 아주 적은데 담배판매량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물론 일본에서 직수입한 담배를 팔았으리라.

3.1독립만세운동 직후였는데 담배소비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가? 세상에 되는 일은 없고 한숨과 비탄만 늘었으니 저절로 맛을 들인 담배만 줄곧 피워댄 것이다. 담배를 심심초, 번뇌초라 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1935년도 통계도 분석하면 흥미롭다. 일본에서 들여온 담배분량보다 국내제조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 보인다. 담배의 제조와 판매량도 무서운 기세로 폭증하고 있다. 엽서에서 ‘瓩’라는 글자는 kg의 일본식 한자다. 살아내기가 어렵고 힘들었던 세상, 담배연기 속에 한숨과 비탄을 뿜어 날렸던 당시 민중들의 심리적 여건과 정황을 이 엽서통계 하나로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대구전매청 직원들이 일장기 앞에 서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는 엽서 사진도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다음에 찾게 되면 올리리라.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