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법조계 IT 구루’ 강민구 판사 퇴임 “재판은 ‘일개 판사’ 아닌 ‘일국 판사’로 임해야”

강민구 판사는 공직을 ‘적선지가 필유여경’을 가슴에 품고 살아냈다. 

2024년 1월30일 만 36년 법관으로 공직을 마무리하는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년 퇴임사를 올렸습니다. <아시아엔> 독자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편집자>

사랑하는 법원 구성원 여러분께

오늘 저는 법원과 함께 걸어왔던 서른여섯 해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1월 30일 퇴임식에서 동료 서울고등법원 판사들과(앞줄 오른쪽 4번째가 강민구 판사)

저의 소회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정년 퇴임식 자리를 마련하고 참석해 주신 윤준 서울고등법원장님과 서울고등법원 구성원 여러분들,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해 주신 법원행정처 천대엽 행정처장님과 관계자분들, 법원 구성원 여러분들, 외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988년 3월 1일 법관으로 임명받아 법원에서 36년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따르는 것이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당연한 이치이지만, 막상 정년 퇴임식이라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마주하니 머릿속에 그간의 나날들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2024년 1월 18일 부산지법에서 고별강연을 마치고. 

2017년 1월 11일 부산지법 고별강연 끝에 ‘공직자는 한없이 국민과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짝사랑하다가 때가 되면 노병처럼 사라지면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제 와 보니 그 말이 저를 두고 한 예언이었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저의 법조 인생을 돌이켜 보니 국민과 법원을 한없이 짝사랑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별의 앞에서 할 말은 태산처럼 많지만, 이미 공개한 12권의 부족한 저의 전자책에 소상히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법관으로서 36년간 근무해 오면서 쌓이게 된 저의 경험에 비추어, 후배 법관 여러분께 감히 두 가지의 당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법대 동창회로부터 자랑스런 법조인상 수상 당시 강민구 판사(가운데)

첫째로, 어떠한 경우에도 법관의 재판에 근간과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은 헌법·헌법정신과 법률 그리고 확립된 판례·선례, 공평한 사회적 정의감이지, 그때그때의 사회적 분위기나 시류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진영 논리나 이념적 태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판사는 개인이 아닌 ‘국가’의 중요한 부분이자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 재판이라는 고귀한 직분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외부 압력이나 사회 분위기에도 좌우되지 않고 재판함에 있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법관 스스로와 법원을 지켜나갈 수 있는 의연한 법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결국 재판에 임함에 있어 ‘일개 판사’가 아니라 ‘일국 판사’의 권능과 자긍심으로 임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부산지법 특강 중 AI 활용법을 시연하고 있는 강민구 판사

둘째로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제 인공지능, 즉 ‘생성형 AI’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Bard, Copilot(=Bing), Chat GPT, Clova-X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활용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시대 발전은 더 이상 외면하거나 피할 수 없는 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필요한 선례를 검색하기 위해 ‘판결문검색시스템’에 검색어를 입력한 후 하나하나 판결문 파일을 찾아 읽어보면서 자료를 선별하던 고된 작업은, 이제 딥러닝과 빅데이터 학습을 통한 ‘생성형 AI’ 기술의 적용으로 그 부담이 경감되고 재판업무 효율과 역량을 현저히 끌어올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업무 능력을 갖춘 새로운 시대의 법관이 되어 주실 것을 당부 말씀드립니다.

먼저 떠나는 저의 빈자리를 채워서 여러분 모두 사법부의 독립과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 보장에 더욱 매진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법원을 떠나지만, 법률과 사회에 대한 제 관심은 계속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배운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에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일을 하면서, 사회 속의 디지털·AI 격차(디바이드)와 소외 현상을 줄여나가는 일도 함께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의 좌우명에 따라 제 길을 변함없이 걸어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라고 한 문정희 시인의 시구절처럼, 돌아보니 법원에서 보낸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모든 나날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소중히 마음에 담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거자필반(去者必返)’의 인연법으로 앞으로의 여정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동안 저와 함께 법원에서 한 팀(ONE TEAM)을 이루어 많은 고생과 헌신을 한 법관과 직원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퇴임 사흘 전인 지난 27일 아내와 아들과 함께 정리한 책과 컴퓨터 등이 담긴 상자들. 강 판사는 “가족이 서초동 청사 사무실에 처음 오니 감개가 무량하다. 가장의 36년이 정리되는 현장에 가족이 함께 하니 고마움이 가득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가정에서 묵묵히 성정 급한 가장을 위해 모든 희생을 한 아내 장형원과 무관심한 아버지인데도 반듯하게 성장한 세 자녀와 학창 시절 저에게 헌신한 두 누나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저 하늘의 별이 되신 조부모·부모·장모님의 영전에 이 소식을 전하고, 저에게 여전히 큰 힘이 되어 주시는 장인어른께도 사위의 이 모습을 보고드립니다.

법원 구성원 여러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행복하시고 후회 없는 하루하루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4년 1월 30일
강민구

 

동료 판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고등법원을 떠나고 있는 강민구 판사. 그는 “퇴임 전에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도 일차적으로 일단락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마무리되니 그 인연법도 오묘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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