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들의 눈물···봉하마을 이재명·강정마을 윤석열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광산을 방문했다. 탄광회사 강당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250여명이 모여 있었다. 박정희 내외가 들어서자 앞자리 간호사들부터 흐느끼기 시작했다. 장내는 이내 울음바다로 변했다. 대통령 내외도 손수건을 꺼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수백명이 돈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으로 나와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현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고개를 숙인 채 원고를 보지 않은 채 즉흥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겠지만 왜 이 먼 곳까지 왔는가를 명심해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박정희가 “비록 우리 생전에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남들과 같이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꼭 닦아 놓읍시다”라고 목이 잠긴 채 말했다. 그의 연설은 끊어졌다가 이어지곤 했다. 장내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줄었다를 반복해서 불가피했다.
“참!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먼 타지까지 나와서 고생이 많습니다.” 당시 박정희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두 눈이 충혈돼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 뒤 장내에 못 들어오고 바깥에 있던 광부들은 박정희 육영수 부부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 박정희가 계속 눈물을 흘리자 옆 좌석의 뤼브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주겠습니다.”
박정희는 가난한 나라의 경제개발 ‘시드 마니(Seed money)’를 구하러 미국으로 갔다가 존 F 케네디에게 냉대를 받은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서독에 간 이유도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 형식이었지만 경제 개발 종잣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간 김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고생하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 차 방문했던 거다.
나이팅게일이 영국 여왕에게 받은 훈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어려운 사람에겐 돈이나 물건을 제공하라. 그것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 물질과 몸으로 할 수 없으면 눈물로 위로하라.”
수만 리 타관에 나온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던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기에 ‘눈물 위로’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때 1917년생인 박정희의 나이는 47세였다. 당시로는 작지 않은 나이이긴 했지만 젊은 지도자였다.
오기의 정치인 YS는 내가 과문한 탓인지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목격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박정희 눈물에 정치 9단 YS가 속았다는 말만 귀에 생생할 뿐이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 선포 후 야당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월남 공산화의 파장이, 안보 위협론이 그만큼 컸던 거다. 5월 21일 그 유명한 박정희 김영삼 영수회담이 열렸다.
이날 속을 털어놓고 두 사람은 여러 얘기를 주고받았다. 박정희가 말을 마치는 순간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YS가 “유신헌법을 빨리 철폐해 멋진 민주주의를 하자”며 대통령 직선제 부활을 받을 것을 압박했다. 그때 박정희는 “김 총재”라고 부르더니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YS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울지 않았다면 ‘그럼 언제 할 거냐?’고 따져 물었을 텐데…”라고 밝힌 바 있다.
DJ는 2009년 5월 노무현 영결식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DJ는 휠체어를 타고 영결식에 왔다. 영전에 국화 한 송이를 바칠 때는 불편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걸어가 고인을 추모했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족에게 휠체어를 타고가 위로하면서 비통한 표정으로 오열한 바 있다.
직정적인 노무현은 시위나 농성 현장 등에서 연설하다 울컥하며 눈물을 흘린 일이 잦았다. 재직 중에도 “많은 일에 많이 울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노무현은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2002년 대선 때 제작한 TV광고 중 ‘노무현의 눈물’은 단연 화제를 모았다.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대한민국. 네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노무현의 눈물 한 방울이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노무현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이 광고의 울림은 매우 컸다. 유권자들 반응이 거의 폭발적이었다.
눈물 흘리는 세상이 아름다우며 맑고 향기로운 법이다. 눈물 한 방울은 순수하고 그윽하게 세상을 변화시킨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 이후, 한 달 만에 대국민 담화에서 진한 눈물을 흘렸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는 일부 언론은 “눈물 연기였다” “악어의 눈물이다”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곡절이 있는 영화만 보면 눈물을 흘리기로 유명하다. 주인공이 노무현을 연상시킨다는 평의 ‘광해-왕이 된 남자'(2012년)를 보고 종영 후에 펑펑 울었다. 노무현이 부림사건 변호를 맡은 ‘변호인'(2014년)을 봤을 때도 극장에서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다.
비정규직을 다룬 ‘카트’를, 2015년 ‘연평해전’을, 앞서 ‘국제시장’을 보고도 울었다. 문 대통령은 국무회의 때도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결혼할 남친이 있는 공군 여중사가 성폭행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에 분노하면서였다.
?여야 유력주자 두 명도 묘하게 하루 사이를 두고 노무현을 추모하며 눈물 흘렸다.
이재명 후보는 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고 노무현의 묘소를 참배했다. 헌화와 분향한 뒤 묘소로 이동해 너럭바위에 손을 올리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이재명은 “다시 봉하에 왔다. 이곳을 보면 언제나 그 참혹했던 순간을 잊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이재명은 성남 상대원 시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연설을 한 바 있다.
친형과의 다툼 등 불행한 가족사를 언급하면서 감정이 울컥 북받쳤던 거다. 다음날 그는 “(전날) 울었더니 속이 시원하다. 더 이상 울거나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윤석열 후보는 5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 얘기부터 꺼냈다. “2007년 노 전 대통령께서 많은 반대에도 고뇌에 찬 결단을 하셨다. ‘제주 해군기지는 국가의 필수적 요소다. 무장과 평화가 함께 있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윤석열은 “(노 전 대통령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과 평화의 서막을 연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한동안 잊지 못했다.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저는 노 전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을 가슴에 새긴다”고 했다.
역대 대통령들과 유력 후보들의 눈물에 가슴 시리고 뼈아픈 사정이나 감동적인 사연들이 왜 없겠는가?
누구의 눈물이든 그 눈물에는 사연이 있고 의미가 있다. 눈물을 쇼라고 함부로 말하는 건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
모든 눈물에는 남모를 사정이 있고, 제각각의 사연들도 있을 거다. ‘정치인의 눈물’, ‘배우의 눈물’ ‘여자의 눈물’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말도 있다. 속아 넘어갈지언정 눈물 자체를 의심하진 말자, 그래야만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