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건국대 전 이사장 북촌서 ‘원색의 전업화가’ 변신
17년간 건국대 변화·발전 주도 후 그림세계 복귀
서양화가인 김경희 전 건국대 이사장. ‘여장부 김경희’라고 불린 때도 있다. 지난 주 지인들을 초대해 북촌에 ‘하영갤러리’를 여는 조촐한 세리머니를 했다.
억척스럽게 일에 몰입하던 사학 이사장은 이제 전업화가로 변신을 선언했다. 그러나 덜 치열하게, 즐기면서 색조의 마술사와 같이 작품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정대철 헌정회장과 근래 여기저기서 자주 마주친다. 내가 형으로 모시는 성낙인 전 서울대총장도 오랜 인연으로 그 자리에 왔다.
김종량 한양대 이사장, 전·현직 화랑협회장 등을 비롯해 각계 스무명 남짓이 모였다. 김경희 이사장의 여고동창인 문정희 시인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김경희 이사장과 한양대 건축과 동기인 류춘수 회장과 내가 마침 같은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김경희 화가가 3년 전 펴낸 에세이집 <희망으로 꽃을 피워>(도서출판 알에이치코리아)도 선물했다.
거기에 나온 김경희의 약사를 살펴봤다. 11회의 개인전과 300여회의 그룹전을 가진 중견 서양화가로, 2001년부터 2017년까지 건국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대학병원 신축, 로스쿨 유치, 스타시티 개발, 첨단 교육시설 증축 등의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사학 이사장으로서 고군분투한 17년간의 학교 이야기를 비롯해 화가로서의 꿈과 좌절, 열정과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화가의 꿈을 접고, 시아버지인 독립운동가 상허 유석창 선생이 세운 학교를 살리고 키우는데 오래 매진했다. 숱한 좌절과 낙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정을 꽃 피웠다.
김경희라는 사람 내음으로 그윽한 책을 일별하니 새삼 새로웠다. 세간에서는 학교 재단 운영에 관해 이런 저런 악소문도 많았다. 하지만, 시아버지와 남편이 열정을 바친 학교가 망가져가는 것을 보고 결심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학교에 대한 꿈과 사랑을 꼭 이뤄내고 말겠다는 다짐이자 각오였다.
그렇기에 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앞장섰고, 욕을 먹더라도 모두 감당하려고 애를 썼다. 부잣집에서 자란 어린 시절, 행복하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결혼 8년 만에 남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슬픔은 그를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도무지 사는 게 힘겨워 두 딸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도피하듯 떠났다. 숨을 쉴 수 있는 곳으로 찾아든 것이다. 한양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미술에 빠져, 대학 4학년 때 국전에 입선한다. 건국대 설립자 상허 유석창 박사의 맏며느리다. 시아버지의 나라 사랑과 교육설립 이념을 옆에서 직접 들으며 존경의 마음을 새겼다.
상허 선생 타계 후 남편이 건국대 이사장 자리를 맡았다. 그러나 곧 남편마저 불귀의 객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절망과 우울, 공허함에 짓눌렸다. 등이 휠 정도로 삶이 힘겹고 무거웠다. 살기 위해 미술 공부 하러 미국으로 떠났다. 두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년만에 돌아왔다. 설립자 집안이라 재단이사를 맡게 되면서 학교 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권과 비리로 학교 운영은 엉망이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어떻게 만든 학교인데…망하게 버려둘 순 없었다.’
그래서 학교를 되살려 보려고 열정을 불태웠다. 교수진과 노조, 이사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학교를 되살리자고 설득하고 이해를 구했다. 그 진심이 전달되어 드디어 이사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이사장으로서 병원 건립, 로스쿨 유치, 더샵스타시티, 더클래식500, KU골프장 설립 등 큰일들을 주저 없이 척척 해냈다.
‘여장부 김경희’라는 세평도 얻게 됐다. 지금의 달라진 건국대의 위상은 오롯이 김경희의 열정과 집념의 소산이다. “학교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17년의 시간은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시아버지 상허 선생과 짧은 생을 살다간 남편 보기에도 좋았으면…”라고 넋두리하듯 말한다. “나중에 그분들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는데, 부끄럽지 않아 다행이다.”
화가로 다시 태어날 김경희는 첫눈에 ‘사랑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난다’고들 말한다. 김경희 스스로도 이를 고마운 칭찬쯤으로 여긴다. “부모 복, 형제자매 복은 선택할 수 없기에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이다. 지금도 그 모든 것에 한없이 감사하다. 그런 아낌없고 무조건적인 애정을 받았기에 훗날 감당하지 못할 아픔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돈만 많은 졸부 집안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요 의사이자 교육에 헌신한 분의 가문으로 시집갔다.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님은 오직 하나만 생각하는 분이었다. 바로 건국대학교였다. 정말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한 가지에만 열과 성을 쏟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돈 전부를 학교 발전을 위해 쓰셨다. 털끝만큼의 사심도 없는 분이었다. 교육 재단을 운영하면서 얻는 수익을 자식들에게 한 푼도 물려주지 않으셨다.”
상허에게 학교는 부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헌신의 무대였다. 김경희가 초석을 놓은 ‘스타시티’는 건대입구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거주와 오락, 여흥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지역 발전의 복합문화 공간이 탄생한 거다. ‘건국대의 변신!’ 이런 대단한 역사를 기획·실행·구현한 주역이 바로 이사장 김경희다.
‘힘든 일은 있어도 안 되는 일은 없다.’ 열정 하나로 희망의 꽃씨를 심어 활짝 피어나게 만들었다. 17년간의 고군분투를 뒤로 하고 이제 그림세계로 돌아왔다.
미술 평론가가 회고했다. “원색을 대담하게 쓸 줄 아는 화단의 기린아가 나타났다. 그림세계 편집장에게 그를 주목하라고…” 이사장 17년의 간난신고와 빛과 그림자를 뒤로 하고, 화가로서 북촌시대를 활짝 꽃 피우길 빈다.